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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대한뉴스 인연실화-자식의 큰 스승은 부모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

대한뉴스 인연실화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될 김원모 발행인의 인연들을 소개한다.

"내 자식이 정말 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엄마, 때로는 어머니여야 하고 아버지는 자식이 따라올 길을 내어주는 길잡이이며 사회적 정신이여야 한다. "
-대한뉴스 발행인 김원모


요즘 TV뉴스를 보면 자식을 잘못 키워서, 또 어긋난 자식 사랑 때문에 많은 국민의 공분을 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잘못을 두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학부모가 스승의 멱살을 잡는 등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뉴스를 접하며 우리의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이런 문제 사안들은 교육기관만의 책임은 아니다. 이 시대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가정에서의 권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권위의 출발점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다. 발행인은 훌륭한 자식을 바란다면 먼저 자식으로부터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발행인과 아들 김시헌의 인연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 일화

김시헌 씨가 영훈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각종 잡지와 CF, EBS 표지모델 활동 등으로 연예인 생활과 학업을 병행했다. 두발 자유가 없던 학교에서 연기자로서 절차에 따라 두발 자유증을 발급받았다. 어느 여름날 체육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셔츠만 입고 윤리 수업에 임했다. 선생님은 김시헌 학생을 지목하여 왜 머리를 기르느냐며 옷을 입으라고 했다. 모든 학생이 셔츠차림임에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혼자만 옷을 갖춰 입었다. 그러자 개나 소나 다 연기하는데 나도 연기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김시헌 학생은 글쎄요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날아오는 지시봉을 막자 화가 난 선생님은 다시 엎드리라며 세게 엉덩이를 때렸다. 김시헌 학생은 왜 맞아야 하냐며 몸을 비틀다가. 오른팔 뼈에 금이 가는 사단이 벌어졌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반항했다며 김시헌 학생에게 징계를 내리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김시헌 학생은 집에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발행인은 선생님이 화가 나셨다면 큰절을 올리고 일단 사죄를 하여라. 그런 다음에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속이 상했다.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개나 소나라는 소리를 윤리 선생님께 듣고 이유 없이 맞아서 억울한데 큰절을 올리고 사과를 하라니. 더군다나 당시 서울경찰청 출입기자로 언론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서 선생님의 불의를 알고도 그냥 넘기려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아버지가 법을 어겼다면 네가 고발하겠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부모 같은 분이시다. 아버지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 김시헌 학생은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결국 학교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큰절을 올릴 수는 없었다. 선생님 또한 징계를 내리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날

발행인이 학교에 도착하자 정영택 교감 선생님은 학교 입구부터 발행인을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이하며 안내를 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김시헌 학생의 자술서를 받았다. 당시에 발행인은 아들이 자술서를 썼는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자술서에는 아버지가 선생님의 잘못을 따지지 말고 큰절을 올리라는 내용이 있었다. 교감 선생님은 발행인의 인격을 알아보고 친절하게 안내를 맡았다. 징계위원회에서 스무 명 남짓한 선생님들은 김시헌 학생이 불량한 학생이라고 입을 모았다. 교사의 말을 다 듣고 발행인은 말했다. “갓 학교에 입학한 학생을 머리의 길이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은 도리와 효 사상에 있어서 서울대학교 수석을 줘도 아깝지 않은 모범 학생이라고 아버지로서 인정한다.“라고 했다. 순간 선생님들은 조용했다. 이어 발행인은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 사랑의 매를 들더라도 왜 맞는지 알아야 합니다. 학생이 사랑의 매에 불만이 있으면 안 됩니다. 또한, 매는 세게 때리지만, 손은 상처 자국에 약을 발라주며 덕담을 나누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침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결국, 징계위원회 결과는 없었던 일로 끝났다.

 

교육자 신분증을 내려놓고 남자 대 남자로서

위원회가 끝나자 담임 선생님은 발행인에게 윤리 선생님의 무례함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혼을 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발행인은 10살 연하의 윤리 선생님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로 옮겨 교사 신분증을 받아 잠깐 내려놓고 말을 했다. “자 이제부터 선생님과 학부모를 떠나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합시다. 나는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선생님이 시헌이에게 개나 소나라는 말을 했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그랬어?” 선생님은 사건 당일에 안 좋은 일로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김시헌 학생을 불량학생으로 보고 체벌을 했다고 고백을 하였다. 발행인은 선생님의 자식이 이렇게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저는 용서 못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치료비는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발행인은 화가 났다. “치료비는 필요 없고 몇 대 맞아야 하겠다.”고 했다. 아들을 불량학생으로 몰아 몸을 다치게 하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감추기 위해서 징계위원회까지 연 선생님의 행동은 도리에 한참 어긋났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발행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발행인은 신분증을 돌려주며 앞으로 많은 제자에게 존경받고 기억에 남는 스승이 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매듭을 지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한국차인연합회는 다인(茶人)인 김시헌 학생을 큰 행사의 팽주(烹主:차를 달여내는 사람)로 초대한다는 공문을 학교로 보냈다. 학교에서는 깜짝 놀랐다. 불량학생으로 오해한 선생님들도 김시헌 학생을 귀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김시헌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모범 학생으로 자리했다.

 

사건 이후

발행인은 그동안 아들에게 학교에서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성인이 돼서야 차를 마시며 옛날 팔을 다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선생님을 혼내면 어른들을 어려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네가 없는 곳에서 혼을 내고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주었다. 너도 학부형이 되었을 때는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식이 보는 데서 스승님과 또는 어른들에게 절대로 험한 소리나 과한 행동은 하지 말라며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비록, 스승이 명백히 잘못하였더라도 제자 앞에서 스승의 권위를 세워주고, 이후에 잘잘못을 가렸던 발행인의 지혜였다. 김시헌 씨는 아버지와 사이에 힘든 과정이 많았지만, 그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모습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해주신 덕담은 저한테 큰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무실에 갔다가 겪은 일입니다. 퇴근 무렵,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김밥을 파는 할머니가 서 계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어서 들어오이소.” 정겨운 말을 건네며 김밥을 사셨죠. 아버지는 식사 약속이 있었는데 왜 김밥을 사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비가 오는데 할머니가 5층까지 올라오신 것은 대한뉴스 간판을 보고 올라오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팔아드리면 5층까지 올라오신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할머니에게 쉬었다가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약속이 있으셔서 나가셨습니다.

아버지 주변의 인연들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지혜롭게 처세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예를 들면 타시던 승용차를 중고차 시장에 내놓을 때에도 평범한 사람은 생각 없이 기름을 채우지 않고 파는데 아버지께서는 세차하고 차의 이력과 크고 작은 결점들을 편지에 쓰시고 기름을 가득 채워 파셨죠. 그동안 무탈하게 같이 잘 있어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시집을 보내는데 깨끗이 목욕시켜 주신다며 세차를 하시고 배불리 먹여준다며 기름을 가득 채워서 보내셨어요. 자동차를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셨죠. 한두 대는 현재 장한평 중고차 매매상인 이봉주 사장님이 가져간 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발행인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시냐고 물었다. ”그동안 나를 지켜준 친군데 그동안 잘 있다가 보내면서 좋은 주인 만나서 신뢰받으라고 주었지. 신뢰를 받으면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리고 제가 중학교때 친구들과 야한 책을 보다가 어머니한테 딱 걸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바람에 저희들은 잔뜩 겁을 먹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오셔서 먼저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 한사람씩 악수를 하시며 축하한다. 너희들이 그 책을 보는 것은 이제 사나이가 된다는 것이다.“ 하신 후 제일 야한 사진을 펼쳐놓고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와 너희들의 고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라고 바른 성교육도 해 주셨습니다.


군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스무 살에 지원해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배치받아 간 곳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한 육군 메이커 부대 3사단이었습니다. 저는 사회성이 부족한 데다가 후임병들은 저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이었죠. 그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만큼 혹독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보초를 서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너는 연기자니 네가 힘들 때 힘든 연기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군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휴가도 나가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잔소리 같았던 아버지의 말씀이 군 생활 마칠 때까지 큰 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등대와 같은 가르침

김시헌 씨는 아버지로부터 사람을 사귀되 높고 낮음을 보지 말고 재물이나 권력을 보지 말고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하고 항상 상대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자랐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둬 주면 고마운 은혜는 잊지 말라는 덕담도 들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에 와서는 아버지의 말씀과 살아가는 모습들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버지 주변에는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등등 많이 계시는데 생각지 못했던 형을 어느 날 저의 사회 스승 중에 한사람으로 삼으라며 소개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회사의 간부들께서 그런 친구를 스승으로 맺어 주느냐고 하자 아버지는 학문이 높거나 지위가 높다고 사회 스승은 아니지 않느냐며 끝만 보고 사람을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형은 한때 부유했으나 어려운 상황이 생겨서 가족이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죠. 밤에 전국 유흥업소를 다니며 화장품을 방문판매하는 저보다 대여섯 살 많은 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고요.”

 

어떻게 아들의 사회 스승으로 맺게 했는지 발행인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일인삼역, 사역하면서 목표를 두고 가는 사람이지. 남으로부터 자기를 굽히는 것을 배우고 늦은 밤이 되어야 방문판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침이슬을 맞으며 열심히 사는 모습 그리고 어렵게 번 돈으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옛말을 실천하는 귀한 청년이라서 우리 아들의 사회 스승이 되어 달라고 했어.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만한 주제가 되냐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지. 무슨 날이면 항상 정장하고 깍듯이 찾아올 줄 알고 내가 덕담을 하면 깊이 듣고 실천을 하는 보기 드문 친구야. 요즘에는 돈을 벌어 동생을 시집도 보내고 돈을 아껴서 아버지의 방을 얻어 새어머니와 생활하실 수 있도록 하며 생활비를 드리는 이 시대에 본이 되는 젊은이지.”라고 발행인은 말했다.

 

취재를 마치며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아버지들은 생각 없이 잠든 자녀들의 입을 맞추거나 뺨을 비비기도 한다. 발행인은 아이들이 클 때 술 접대도 많았고 담배도 자주 피웠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술냄새나 담배 냄새를 맡지 않도록 했다. 술에 취하면 한겨울에도 동네를 몇 바퀴씩 돌며 술이 깨야만 귀가를 하려고 노력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면 집에 전화해서 아이들을 자신들의 방에 잠시 들어가 있으라 한 뒤 귀가를 하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술에 취해 흩어진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자식의 첫 번째 스승으로서 지켜낸 아버지의 원칙이었다.

자식에게 살아있는 교육은 감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내 자식이 이유 없이 맞아서 팔에 금이 가서 눈물을 흘린다면 아픈 마음 이상일 것이다. 지혜를 발휘하기는 수월하지 않은 상황이다. 발행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준 가르침은 몇 수를 내다보고 마음을 쓰지 않았을까. 어른은 어른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생각해본다. 선생님을 용서한 것은 선생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자식에게 어른 공경하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조금만 불편하면 학교에 쫓아가 선생님에게 함부로 하는 학부모들을 바라보며 어른의 지혜를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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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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