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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대한뉴스 인연 실화 -한 사람의 인연이 더 크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김경희씨 가족들과의 인연

대한뉴스 인연실화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될 김원모 발행인의 인연들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모두 빈손으로 떠난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다음 생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까 보다 내가 어떻게 도와 줄까를 생각하며 사는 게 행복하다. 시간이 가면서 누구에게 보고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으로 남는 것 또한 인생의 보너스가 아닐까.”
- 인연 실화 ‘ 가난과 외로움이 나의 재산이었다’ 본문 중에서 대한뉴스 발행인 김원모


(대한뉴스 조선영 기자)=빠르게 변하는 사회일수록 인간의 기본과 도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늘 배움이 부족하다며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던 발행인이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진지하게 걱정했던 남다른 인연이 있다. 눈물겨운 모성애를 통해 인간의 도리는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해준 소중한 인연 김경희 씨와 가족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경희씨와의 만남

발행인은 말한다. “20대 초반의 경희를 만난 건 용두동 살 때였어요. 집 근처 후배약국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경희는 정말 곱고 눈이 선해 보였죠. 그런데 화사한 얼굴 곳곳에 슬픔이 배어있었어요. 한 번 보고도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친해진 계기랄까. 약국을 드나들며 경희가 밤이 되면 나이트클럽을 자주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밤 자정 가까이 간당간당하게 들어오는 그녀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죠.”

 

지금 말로 소위 나이트클럽 죽순이’, 그것도 1980년대의 스테이지 퀸’. 나이트클럽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왜 김 씨는 그렇게 나이트클럽을 찾았던 걸까?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을까 싶지만, 귓가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음악을 들으면 모든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랑 이름이 같은 친구와 또 다른 친구 이렇게 삼총사가 함께 다녔죠경희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히 갔던 나이트클럽에서 경희 씨 일행은 그야말로 대접을 받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시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웠던 삼총사가 일단 나타났다 하면 남자들이 너도나도 선물 공세를 펼치니 젊은 경희 씨는 내심 그런 공주 대접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주 나이트클럽를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경희 씨의 어머니가 창동에서 막걸리와 부침개, 골뱅이 등을 파는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첫사랑 어머니가 술집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아들의 여자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첫사랑과 헤어진 뒤 마음을 잡지 못한 경희씨는 그렇게나마 마음을 풀었던 것이다.

 

발행인이 보호자가 되어 삶을 길잡이 하다

발행인은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다 큰 처자가 그렇게 밤마다 나이트클럽을 다니니 경희의 어머니는 걱정이 많을 수밖에요. 그런 거 보면 아이의 교육은 대체로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엄마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제가 경찰청 출입기자 시절 언론사 차장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 생일날 생선회를 떠서 경희와 저희 집을 찾아오셨어요. 저에게 우리 경희가 차장님 외에는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으니 잘 부탁한다며 연신 허리를 굽히고 부탁을 하셨죠. 당시 경희 어머니가 보여주는 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저에게는 너무나도 부러운 일이었지만 앉으나 서나 딸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경희 어머니를 보다가 경희를 보니 저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보호자의 마음으로 나섰죠.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테지만, 삶에서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젊은 아가씨를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민했죠. 비뚤어지고 모난 경희의 마음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러다 가장 기본적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교육은 먼저 인간이 되는 교육이라는 생각이 스쳤어요. 그래서 경희가 남을 도우며 남자친구 때문에 낮아진 자존감을 높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애인부활교회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다

다음 날부터 발행인은 하남시에 개척한 장애인부활교회에 아침마다 경희 씨를 떨궈 놓았다. 장애인부활교회는 당시 경기도 광주군 신장읍(현재 하남시)에 위치하고 발행인이 30여 명의 장애우들을 주변 사람들이 모르게 돌봐주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2동이 교회고 그들의 안식처였다. 경희 씨를 아침에 교회 앞에 내려주고 퇴근 시간에 다시 태워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데려다 주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싫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겠지만, 무려 3년 동안 경희 씨는 발행인보다 일찍 나와 발행인의 차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발행인은 처음에는 낯설어 주뼛주뼛했지만 경희는 곧 비닐하우스 일이며, 장애인를 돌보는 일 등 교회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이들과 함께 지내며 경희는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갔죠. 그녀는 점점 더 겸손하고 성숙하게 무르익었던 것 같습니다.” 발행인의 말에 경희 씨가 수줍게 웃었다.

원래 봉사하는 걸 좋아해요. 이것저것 다 싫을 때 몸이 불편하신 분들과 있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거부감이요? 전 그런 거 없었어요. 봉사하러 오셨다가도 지독한 냄새에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그냥 가시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3년 동안 그분들과 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했어요. 특별히 봉사 정신이 투철하다거나 마음이 고왔던 게 아니에요. 사실은 제가 더 많이 위로받았거든요. 당시 장애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을 하루하루 깨닫게 되어 처음으로 책임감이라는게 생겨 매일 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마다 감사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엄청 인기가 많았어요.”

경희 씨는 3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가진 행복이 무엇인지, 지금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갔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조금씩 변화할 수 있었다.

 

의젓한 준공무원의 경희씨

처음과는 180도 달라진 경희 씨를 발행인은 이제 사회인이 되어도 손색이 없다 싶어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문화부 산하 청소년연구원이라는 기관에 출근하게 도와주었다. 경희 씨가 준공무원으로 일하던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 김외순 씨가 발행인을 찾아왔다. “경희가 많이 달라진 것이 제 덕이라며 고마워하셨어요. 그리고는 곧 딸이 시집을 가야 하는데 어디가 좋겠느냐며 딸의 혼인 문제를 상의하셨죠. 마침 그녀와 헤어졌던 첫사랑이 달라진 경희의 소문을 듣고 다시금 찾아와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저는 그 첫사랑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에는 용기가 없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 못했지만, 한 여자를 마음에 품고 여태 잊지 못했다면 시간이 지난 만큼 경희를 아끼는 마음도 더 단단해졌을 테니 믿어보는 게 어떠냐고 말이죠. 결국 경희는 그해 그 첫사랑과 결혼해 현재 11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큰 딸은 대한항공 승무원이며 아들은 직장인입니다.”

  

경희씨와의 작은 인연이 가족과의 큰 인연으로

경희 씨와 14세가량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발행인. 한창때 만난 두 사람이지만 경희야”, “삼촌하며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고 있었다.

경희가 한창 아름다웠을 때였으니 저도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남자에게 상처받고 경희가 방황했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죠. 경희의 믿음을 속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발행인을 바라보던 김외순 씨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희와 발행인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왠지 모를 믿음이 있었거든요. 딸을 보호해 줄 것 같은. 지금도 늘 같아요. 발행인과 얽힌 숱한 세월 동안 한순간도 발행인은 저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김경희 씨와의 인연은 곧 그 가족과의 인연으로 발전했다. 경희 씨의 아버지가 집에서 논다는 소리를 듣고 발행인은 남대문 IM 의류상가에 주차 관리로 그의 아버지를 추천했다. 그러나 언문을 깨우치지 못한 경희 씨의 아버지가 적응을 못해 그만 두었다. 그래서 발행인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주었다.

당시 서울에는 4개의 면허시험장이 있었어요. 강남, 도봉, 강서에 이어 막 서부 면허시험장이 생겼는데 19942월에 그곳을 발행인이 입찰을 받아서 주었습니다. 매점과 구내식당 등을 거의 10년간 독점했습니다. 정확한 수입이요? 기억도 안 나요. 그때는 거의 돈을 긁어모았던 것 같아요.” 김외순 씨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발행인이 말을 이었다. “동업한 첫 달에 경희 어머니가 제게 700만 원을 주더라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절대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이후에도 매달 600~700만 원을 투자 반환금이라며 챙겨주시는데, 너무 부담스럽더라고요. 물론 허가부터 입찰받기까지 왜 돈이 않들었겠습니까? 하지만 5개월 뒤 충분히 제 몫을 돌려받았다는 생각에 이제 그만 받겠다고 했죠. 그런데도 한사코 돈을 가져와서 제가 모진 소리도 했어요. ‘내 배당금은 이제 다 받았다. 가게가 손해나게 되면 내가 그 돈을 충당해줄 수 없으니 더 이상 돈 가져오지 마라.’했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서운하지 않았느냐고 김외순 씨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는데 진심을 알기에 발행인의 말을 따랐습니다. 운전면허를 주민등록증에 표시된 곳에서만 시험 볼 수 있던 제도에서 주소지와 상관없이 전국에서 응시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려 애쓴 경희 씨 가족들

김외순 씨는 발행인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발행인은 대한뉴스를 인수한 데에도 사실 김외순 씨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동업하기로 하고 대한뉴스를 인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저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중도금을 걸고 잔금을 낼 때 두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경희 어머니가 돈이 필요하다는 제 소식을 듣고 필요한 돈을 구해주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동생이 계주로 있는 계모임에 자신이 보증을 서고 1,2,3번을 먼저 타게 해준 것이었어요. 당시 계모임은 계원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추첨해 순서대로 돈을 받아가고 곗돈을 1-2년 붓는 거였는데 말이죠.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인연이죠.”

이렇게 김외순씨의 여동생과 발행인이 계모임을 17년 정도 했는데 발행인이 마지막 곗돈 100만 원을 넣자, 며칠 후 김외순 씨는 동생이 전달해 달라고 했다며 200만 원을 들고 왔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발행인은 한 번도 돈을 밀린 적이 없어요. 계주로서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옷이나 한 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한 것뿐이에요.”

요즘 계를 비롯한 다양한 친목 모임일지라도 일단 돈이 개입되면 좋은 인연도 원수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어찌됐든 20년 가까이 돈거래를 했다면 속상하고 섭섭한 순간도 많았을 텐데, 웃돈을 얹어준 훈훈한 이야기를 추억하며 두 사람은 시종일관 진심으로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돈 이야기를 이토록 훈훈하게 마무리한 적이 있던가.

 

남동생의 오해에서 결혼식 주례까지 이어지다

발행인이 처음부터 경희 씨 가족 모두에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경희 씨의 남동생 김경훈 씨는 발행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발행인을 볼 때마다 불쾌감을 그대로 표현했다.

당시 누나가 남자와의 상처로 인해 힘들 때 발행인과 자주 만나는 것을 오해했던 것이다. 발행인이 사심이 아닌 진심으로 누나를 도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김경훈 씨는 발행인에게 자신의 결혼식 때 주례를 봐달라고 부탁했고, 현재까지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발행인을 집안 큰 어른으로 생각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영호남의 아름다운 만남

발행인에게 이번 인연이 더욱 소중한 이유는 따로 있다. 경상도 출신인 발행인과 전남 나주 출신인 경희 씨네 가족은 한참 지역 다툼으로 시끄러웠던 시절 만났다. 당시 지인들은 영호남의 아름다운 만남이라면서도 이들의 인연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들은 35년 넘게 그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전라도가 좋다, 안 좋다 주변에서 말이 참 많아요. 하지만 8도에 퍼져있는 인연 가운데 저에게 전라도의 인연이 가장 크고 소중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연고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발행인이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 그 씨앗은 퍼져 더 크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민들레를 생각하면 쉬워요. 돌과 돌의 틈에도 뿌리를 내리고 홀씨가 동서남북으로 날아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민들레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꽃을 묵묵하게 피우죠. 인간관계에도 이러한 성실함과 겸손함이 바탕이 된다면 누구나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자후기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다.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도, 나를 바른 길로 길잡이 해줄 수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하늘이 주는 복이란 생각을 했다.

잘 나갈 때는 같이 다니는 것이 좋게 여겨지다가도 처지나 상황이 좋지 않으면 가까운 사이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인연으로 남기도 한다. 하지만 발행인과 경희 씨네 가족은 서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상태에서 인연이 되었고,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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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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