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정부 공동으로 재조사에 나서야"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1945년 8.15 광복 직후 똑딱선을 타고 귀국하던 조선인들이 현해탄에서 조난당해 `불귀의 원혼'이 된 참사가 적지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동안 이런 아픈 역사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들은 찾질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광복 60년 만인 2005년부터 일본 현지에서 조사를 벌인 끝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을 확인함으로써 광복직후 조선인 해난참사의 진상과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좀더 탄력을 받게 됐다.
특히 조사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고, 태풍 등으로 귀국선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찾아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은 이런 전망에 무게를 실어준다.
수수께끼 수준에 머물렀던 역사가 우리 정부 차원의 조사로 일부나마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직후 조선인 140만명이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 중 90만명이 1945년 8∼11월에 몰린 것으로 국내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이 시기에 수많은 해난사고가 발생했는데 태풍 등으로 변을 당한 조선인 시신들은 파도에 밀려 규슈지역 해안가와 이키섬, 쓰시마 지역에서까지 발견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강제동원 진상 규명은 개인 피해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귀국길 해난참사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조사단이 이번에 '60년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는 한 일본인에게서 찾았다.
미쓰비시의 조선인 강제동원노무자 감독을 지낸 후카가와 무네토시였다.
그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출발한 조선인 징용공들을 배웅했으나 그 가족들에게서 징용공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 들었다.
이에 징용공들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한 후카가와는 미쓰비시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자 1973년 실종자들의 행방을 직접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이키섬 부근에 조선인이 탄 배가 조난당해 해안가에 시체가 매장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유골들이 미쓰비시 징용공의 것으로 추정되자 유족회가 꾸려지고 일본에선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결성됐다. 이 단체들은 이키섬에서 유골을 발굴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보상 요구를 해 1983년 일본의 공식 실태조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후카가와는 이들이 미쓰비시 징용공이라는 사실까지 입증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으로 8.15 직후 대규모 조선인 해난사고가 발생해 인근 주민이 수많은 시체를 임시로 묻은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번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의 조사에서는 그동안 유족회 등의 추정과는 달리 히로시마 미쓰비시 징용공의 유골은 이키섬이 아닌 쓰시마까지 표류했다는 사실을 새로 확인했다.
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골이 지금도 쓰시마와 이키섬 등 여러 곳에 분산돼 있고, 해안가에 방치된 신원 미상의 조선인 유골이 많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오일환 진상규명위 전문위원은 "일본 정부가 이번 조사를 계기로 여러 비슷한 조난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재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은 이미 침몰선 7천 척에 관한 정보와 승선자 명단 등을 파악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이 기록을 넘겨받아 일본과 공동으로 침몰한 배의 인양, 조난자 유골 발굴 등 재조사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yjkim8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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