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16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영하 15도의 추위에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이날 키예프 시가지에는 차분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유럽에서 면적으로는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와 비슷한 4천600만 명인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이번 선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04년 온 나라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던 '오렌지 혁명'이 정치 혼란과 경제 위기 등으로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민주의의에 대한 열망으로 수만 명이 운집했던 혁명의 중심 키예프 '독립광장'.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로 바뀌는 '독립광장' 주변에는 이날도 평상시처럼 시민들이 나와 광장 중앙에 마련된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혈 시민 혁명이 가져온 민주주의 대가는 너무 컸고 당시 혁명 지도자들의 약속은 헛구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의 부패는 도를 넘은 지 오래고,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정쟁(政爭)만 일삼다 보니 2005년 이후 내리 3년 총선을 치렀다.
선거에 이골이 날만도 하다. 그나마 성장세를 보이던 경제마저 2008년 국제 금융위기로 나라 살림이 거덜나면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여러 나라에 손을 벌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지난해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 17%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그단(36. 회사원)씨는 "투표하러는 갈 것이다. 아직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지 않았다. 혁명 당시의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아 현 정권에 실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치 냉소주의와 무관심은 인터넷 사이트에 자신의 투표권을 판다는 광고를 할 정도로 극에 달에 있다.
화학공장에 다니는 알렉산드르(38) 씨는 "정치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 더는 나빠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라며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이런 시민들의 정치 무관심은 이번 대선 승리자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로 떠올랐다.
일부 전문가들은 각 후보가 정치 안정과 경제 회복 등을 외치고 있지만, 이번 선거 이후 오히려 정국 혼란이 심화하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특히 패한 후보가 또다시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5년 전 혁명 상황을 재연하려 한다면 우크라이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나 율리아 티모셴코 후보 모두 선거에 패하면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대중 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정치 평론가인 예브게니 졸로타로프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패자가 선거 결과에 굴복하지 않고 항의 시위를 열거나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 나라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며 "해외 선거감시단과 서방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말했다.
그는 "후보들이 대중영합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문제다"면서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걱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시민은 이번이 우크라이나 민주주의의 전진과 후퇴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세르게이(35) 씨는 "이번 선거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EU로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정치인들도 그간 반성을 많이 했을 것이고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렌티나(46) 씨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을 묻는 말에 "새로운 대통령이 이웃국가와 좋은 관계를 갖도록 외교적 융통성을 발휘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유셴코 집권 5년간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추진, 에너지 마찰 등으로 러시아와 최악의 관계를 보였다.
한편, 이번 선거는 야누코비치 전 총리와 티모셴코 현 총리가 2파전이 될 것으로 보이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2월7일 2차 결선 투표를 치를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과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15일 자정을 기해 모든 선거운동이 끝나면서 이제 각 후보 진영은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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