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부터 고령자 우대 사라지고 성적순 서열
건국직후 초임 판사 월급은 밀가루 5포대 수준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판사는 등산할 때도 식당에 들어갈 때도 성적순"
8ㆍ15광복 이후 법관의 인사는 서열을 엄격하게 적용해 이뤄져 왔다.
당시 서열은 시험 합격 순서를 기본으로 하되 동시에 합격한 이들은 나이 순서로 서열이 나뉘었다.
1979년부터는 사법시험 2차 성적과 사법연수원 수료 성적을 종합한 것이 연령 기준을 대체했고 시험 합격 순서는 1988년부터(연수원 17기) 연수원 기수로 바뀌었다.
이렇게 정해진 서열은 법관의 첫 임지와 서울과 지방 교류 등 인사 전반을 규정하는 획일적 기준으로 활용됐다.
이런 방식은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인사를 가능하게 했지만, 극도로 경직된 인사 운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열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전국법관배치표'였다.
이는 전체 법관의 이름을 법원별로 나누고 같은 법원에서는 서열에 따라 판사를 나열한 표로 전국 모든 판사실에 비치돼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서열 중심의 인사가 판사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근무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에 따라 대법원은 설문조사를 거쳐 법관근무평정제도를 마련했다.
이후 이 제도는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2005년에 처음으로 이를 활용한 정기 인사가 시행됐다.
대법원은 2006년에 임관 후 10년이 지난 법관에 대해서는 본인의 희망과 개인 사정, 연고지, 형평성 등을 고려해 인사원칙을 정하되 단계별로 고려할 요소의 순위를 구체적으로 정하도록 바꾸었다.
이 제도는 성적이라는 획일성에서 탈피했지만, 자칫 기준이 모호하고 주관이 강하게 반영돼 법관이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게 한다는 지적이 있는 등 여전히 논쟁 중이다.
법관의 인사 규칙만큼 큰 변화를 겪은 것이 법관의 보수이다.
1949년 법원조직법이 공포될 당시 밀가루 1포대가 2천246원, 경기미 1가마가 9천830원이었는데 초임 법관(14호)의 월급은 1만800원으로 형편없이 낮았다.
이후 1962년에 법관의 보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1호봉 판사의 월급은 1999년에 151만9천500원에서 2000년에 179만3천800원으로 소폭 상승했다.
또 2004년에 266만9천500원이던 10호봉 판사의 월급은 2007년에 372만8천200원으로 올랐고 이는 사기업체의 대졸 초임(2007년 기준 198만3천원)보다 높지만, 부장 초임(423만원)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아울러 건국 후 사법부는 고등고시에서 판사 특별임용시험, 사법대학원, 사법시험, 사법연수원, 예비판사제도, 법조일원화 등 법관 임용 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시켜 왔다.
사법발전재단이 1948∼2008년까지 사법부가 걸어온 길을 담아 펴낸 `역사 속의 사법부'는 이 같은 사법부의 조직과 운영 방식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했다.
15일 법원 관계자는 "사법부의 운영방식은 당시의 환경과 구성원의 인식에 따라 변천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계속되는 만큼 민주주의와 사법권 독립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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