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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0주년 기념식

   
▲ 지난 3월 26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0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사진 = 장해순 기자)

지난 3월 26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정동제일교회 본당에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0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이승만 대통령이 배재학당 시절부터 다니던 정동제일교회에서 기념감사예배 형태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 행사가 가지는 의미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관심이 더 증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의 주요일정과 재평가 내용에 대해 알아봤다.

기념감사예배
  이날 개최된 기념감사예배는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와 며느리 조혜자 여사,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수많은 내외빈객이 참석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많은 인사들이 화환과 축하의 인사말을 전해왔다. 예배는 정동제일교회 송기성 담임목사의 인도로 진행됐다. 통일한국리더십아카데미 이호 대표의 설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반정부활동으로 5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재탄생했고, 남녀평등사상이 일천하던 시기에 남녀 모두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선각자였으며, 하야 후에도 통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줬다.

  이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 중 하와이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했다. 말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주“누가 통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고,“누구나 다 통일을 꿈꾸고 있다”는 대답에 화를 냈다고 한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해야지, 이승만이 한바탕 했으면 누군가 나와서 또 한바탕 해야지. 내 소원은 통일이 되면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민족통일에 관한 열정만큼은 남들보다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적인 진척이 없는 지금, 우리 모두가 한번쯤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축사에 나선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해방 이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60년도 안 돼 인구 5천만명과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달하는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건국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정 전 총리는 초등학교 시절의 인연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의‘이승만 기념 강의홀’에서 제1회 이승만 박사 추모기념 공개강의를 수백 명에게 한 일화 등을 비롯해 이승만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이어‘이승만 건국대통령에게 드리는 편지’에서는 고려사이버대 1학년 정창대 군과 성균관대를 졸업한 여자청년 대표 한서영 씨가 나섰다. 특히, 정창대 군은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적인 인물로 생각해 왔으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시멘트 공장과 유리공장을 건립하고, 어업평화선 구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선진교육 정책 등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이 지금의 밑거름이 되었고, 통일한국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밝혔다. 기념감사예배는 광림교회 김선도 원로목사의 축도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는데, 김선도 목사는 축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140년 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건축하게 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면서 당신의 백성 모두를 축원한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작업
  올해는 이승만 대통령 서거 50주기가 되는 해로, 반세기가 지나서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해방 전 이승만 박사는『Japan Inside Out』을 발간해 태평양전쟁과 해방정국에 미칠 영향에 관한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내놓았고, 해방 후에도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그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의 법통존중, 38선 철폐 및 신탁통치 반대, 완전한 독립,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했는데, 38선 철폐를 제외하고 모두 실현시켰지만, 정작 소련의 개입과 미국의 방조로 인해 남과 북이 분단에 이르게 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재임시기는 해방정국이라는 혼란한 시기와 국가기반시설이나 인프라가 전혀 없던 시기였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 인적·물적 기반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전선을 돌아다니며 국군의 사기진작에 힘쓰는 한편, 외교로 원조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제를 통한 문맹퇴치, 고급인력 양성, 평화선 선포 등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가 되었다.

  여기에서 한 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왜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은 구한말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해 옥고를 치르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될 만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전개시킨 인물이었다. 비록 자유당이 3.15 부정선거 및 개표부정을 저질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분노한 민심을 잠재우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후 정권들은 이승만 정권을 부정부패의 낙인을 찍어 전통성을 폄하하기에 이른다. 잠시 미국에 머무르던 이승만 대통령이 1962년 3월 17일 조국으로 되돌아오려고 했지만, 영사관 총영사로부터 되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이후 1965년 7월 19일 서거한 후에야 국립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생전에 국내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을 위해 참으로 잘 해나가기 바란다고 전했다고 한다.

  최근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작업과 관련해 기념사업회 이기수 명예회장은 평화선 선포,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반공포로 석방, 농지개혁 등 그동안 여섯 가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해 성과를 내면서 많은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면서 앞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작업을 통해 제자리 찾기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전망했다. 그리고 글로벌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활동을 해왔는데, 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 알리기에 앞장설 예정이다. 이외에도 기념사업회에서는 7월 19일 서거 50주기 추모행사,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62주년 기념행사, 이승만 대통령 알리기 전국포럼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