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화 대표이사는 2006년 한국에 왔다. 10년간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의 눈물과 예전의 배고픔을 떠올리며 이겨냈다. 이제는 최신 설비에 직원 10여 명이 있는 기업의 대표이사로 여러 모임의 회장도 맡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으며, 도리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모범케이스로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제 평생 한국정책재단 임태희 이사장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어려울 때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입니다.”라고 말한다.
한국 생활의 고달픔으로 약간의 우울증이 있던 이옥화 대표이사(이하 이 대표)는 2010년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강다리로 갔다. 뛰어 내리려는 순간 몇 년 전 이 대표를 보며 눈물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과 회사 직원들이 생각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죽지 못해 회사로 갔다. 달리 갈 곳도 없어 밤새 공장에서 넋을 잃은 채로 기계를 만지던 이 대표에게 다음 날 기업은행에서 1억원의 자금을 빌려준다는 희소식이 온다. 겨우 공장을 운영하던 2011년, 당시 대통령 실장인 임태희 이사장이 아무 연락도 없이 공장을 방문했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실장이 보잘 것 없는 이런 영세업체를 방문하다니… 이 대표는 부산 출장 중이라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3시간 동안 공장을 꼼꼼히 둘러보고 직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 준 임 실장,‘새터민은 같은 민족이니 한국에서 기업을 잘 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힘을 모아 달라’는 격려의 말에 회사 분위기는 반전하여 상승한다. 이후 이 대표는 한국정책재단의 소상공인아카데미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소울림포럼의 도움을 받았다. 그간 물건 만드는 것에만 주력했던 것에서 어떻게 수요를 개발하고 마케팅을 할 것인지에 대한 코칭을 받으며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다. 그 사례가 소상공인진흥원의 기술력 혁신케이스 사례발표에서 당선된다. 당선자에게 주어지는 해외견학 시 일본에서 수주도 받았다. 이 대표의 삶을 들여다본다.

▲ 납품할 제품을 직접 점검하는 이옥화 대표이사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에 오기까지
사람이 귀한 것을 대한민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는 이 대표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죽어 있는 사람을 많이 봐왔기에 그냥 동네 개가 죽어 있는 정도로, 사람 죽음이 별반 다르게 다가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기자가 북한에서 즐거웠던 추억이 무엇이냐고 묻자 없다고 했다. 이 대표가 말한다.“12살 때 나무로 된 총을 들고 산을 오르내리며 냉정하고 철저하게 강압적으로 무조건 살아남도록 특공대훈련을 받았습니다. 방학 때 집에 오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눈 덮인 언 강을 건넜다가 그 흔적을 뒤쫓아 온 북한군에게 잡혀 죽음 문턱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맞고 죽을 지경까지 갔던지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가끔 사물도 보이고 말도 들렸습니다. 머리도 길게 풀어 헤쳐지고 눈도 돌아가 있는 피투성이의 제 모습이 만지기 꺼림칙했는지 누군가‘집에 연락해서 치우라고 해’했습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흐느끼며 울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태어나서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으로 옮겨졌으나 여전히 말도 못하고 눈도 돌아간 채 꼼짝 못하는 저를 보고는 가망이 없다 싶으셨는지 부모님은 관을 준비해서 마루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고 숟가락으로 미음을 넣어주셨는데 일주일 만에 일어나 앉았습니다.
사람이 귀한 것을 대한민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는 이 대표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죽어 있는 사람을 많이 봐왔기에 그냥 동네 개가 죽어 있는 정도로, 사람 죽음이 별반 다르게 다가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기자가 북한에서 즐거웠던 추억이 무엇이냐고 묻자 없다고 했다. 이 대표가 말한다.“12살 때 나무로 된 총을 들고 산을 오르내리며 냉정하고 철저하게 강압적으로 무조건 살아남도록 특공대훈련을 받았습니다. 방학 때 집에 오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눈 덮인 언 강을 건넜다가 그 흔적을 뒤쫓아 온 북한군에게 잡혀 죽음 문턱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맞고 죽을 지경까지 갔던지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가끔 사물도 보이고 말도 들렸습니다. 머리도 길게 풀어 헤쳐지고 눈도 돌아가 있는 피투성이의 제 모습이 만지기 꺼림칙했는지 누군가‘집에 연락해서 치우라고 해’했습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흐느끼며 울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태어나서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으로 옮겨졌으나 여전히 말도 못하고 눈도 돌아간 채 꼼짝 못하는 저를 보고는 가망이 없다 싶으셨는지 부모님은 관을 준비해서 마루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고 숟가락으로 미음을 넣어주셨는데 일주일 만에 일어나 앉았습니다.
두 번째 탈출은 강을 건너 중국 땅 아무 집에나 들어갔습니다. 주인을 보자마자 ‘너무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하며 곳간의 쌀독을 보니 쌀이 그득했습니다. 그 쌀독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살을 빼려 노력하지만 그 때는 못 먹어 허리가 두 손으로 다 잡혔었습니다.
중국에 있으며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스포츠마사지사로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사장님께서 저더러 맡아서 해보라고 했어요. 4년 만에 지하 가게를 5층 건물 전체로 확장하며 사업이 얼마나 잘 되던지 마사지 받으려는 관광버스가 줄을 서자 주변의 상인이 저를 밀고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다 버리고 도망쳐 몽고로 갔습니다. 한번 붙잡혀 죽을 고생을 해봤기 때문에 또 붙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몽고에서도 이런저런 일을 겪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받은 가장 큰 선물
“2006년 하나원에서 교육을 수료하던 날 신분증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족보 없이 어둠 속에 타지를 떠돌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제 이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막일을 하려 해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일을 못하고 며칠 만에 나와야 했습니다. 북한말과 조선족말 그리고 중국어 억양까지 섞여 도통 제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어요. 수중에 돈은 10만원 밖에 남지 않아 이럴 바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까도 싶었습니다. 그러다 신문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으면 25만원을 준다는 광고를 보고 무슨 교육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갔습니다. 그날로 컴퓨터에 빠져 한달간 열심히 배웠습니다. 한달이 되던 날 컴퓨터 선생님이 지금 이 회사 사장님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경리로 들어가, 말이 경리지 서류도 하나 모르고 전화도 제대로 못 받았었습니다.”
“2006년 하나원에서 교육을 수료하던 날 신분증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족보 없이 어둠 속에 타지를 떠돌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제 이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막일을 하려 해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일을 못하고 며칠 만에 나와야 했습니다. 북한말과 조선족말 그리고 중국어 억양까지 섞여 도통 제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어요. 수중에 돈은 10만원 밖에 남지 않아 이럴 바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까도 싶었습니다. 그러다 신문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으면 25만원을 준다는 광고를 보고 무슨 교육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갔습니다. 그날로 컴퓨터에 빠져 한달간 열심히 배웠습니다. 한달이 되던 날 컴퓨터 선생님이 지금 이 회사 사장님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경리로 들어가, 말이 경리지 서류도 하나 모르고 전화도 제대로 못 받았었습니다.”

▲ (주)씨케이정공 공장 내부
씨케이정공 사장으로
씨케이정공은 냉각기나 정수기 뒤에 들어가는 방열판을 제작하는 곳이다.“저를 채용한 사장님이 사업을 하나 더 벌였다가 그 여파로 제가 경리로 있는 회사마저 문 닫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변 분들이 그래도 한 3년 경리를 하며 회사에 대해 제일 잘 아니 인수하라고 하기에 했습니다. 80만원 월급 받아 40만원 저축하여 모은 3,8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말이 사장이지 청소부터 조립, 지게차 운전, 영업 등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씨케이정공은 냉각기나 정수기 뒤에 들어가는 방열판을 제작하는 곳이다.“저를 채용한 사장님이 사업을 하나 더 벌였다가 그 여파로 제가 경리로 있는 회사마저 문 닫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변 분들이 그래도 한 3년 경리를 하며 회사에 대해 제일 잘 아니 인수하라고 하기에 했습니다. 80만원 월급 받아 40만원 저축하여 모은 3,8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말이 사장이지 청소부터 조립, 지게차 운전, 영업 등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임태희 대통령 실장 방문, 지옥에서 천국으로
“2009년 회사를 인수해 2010년까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회사는 직원 월급주기도 어렵고, 물건 납품하러 찾아가는 업체에게는 문전박대 당했습니다. 서른 갓 넘은 북한에서 온 여자가 무엇을 알고 무슨 경험이 있어 회사를 운영해 갈 수 있겠냐며 머지않아 문 닫을 거야라는 시선이 팽배하다보니 직원들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정말 어려웠습니다. 견디다 못해 야밤에 죽으려고 한강다리에서 강물에 뛰어들려는 때 어떻게 아버지 우시는 모습이 보이며 같이 고생하는 직원들 얼굴이 보였는지… 엉엉 큰소리로 울며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두 번 살리셨습니다.
2011년 검은 세단 여러 대가 우리 회사에 오자 주변 공장 분들이 다들 무슨 일인가 싶었답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께서 공장을 구석구석 다 둘러보시고는 직원들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며 고생 많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많은 고난 속에 한국에 와 사업을 하는 새터민 사장 사업이 잘되어야 직원 여러분도 좋으니 우리 서로 힘을 합해 돕자고 하셨답니다. 그날 이후 제 뒤에는 임 실장님의 저 같은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인간으로 봐주시는 배려, 어려운 이들에게 격려하며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보이지 않는 힘이 뒷받침 되어 저와 우리 직원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생긴 우울증도 임 실장님 덕분에 다 나았고 지금은 이렇게 활발합니다.”
기업은행을 찾아가 보은의 인사를 하다
이 대표이사는 한국에 와서 고마운 분들이 참 많은데 그것에 대한 보답은 사업을 더욱 열심히 해서 잘 되는 것이라고 한다. 방열판 캐드 작업도 직접하고 경리 일도 보며 10원의 원가 절감을 위해 머리를 쓴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 납품한 물건 값도 제대로 못 받아 본인의 회사도 어렵기에 한푼이라도 절약하며 악착같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추석을 앞두고 제일 고마운 기업은행에 인사하러 다녀왔다. 강화 대곶지점 양춘근 지점장 기업팀 양희종 팀장·김수현 계장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취재후기
이옥화 대표는 한국에 와서 가장 기쁜 것이 자기 이름 석자로 떳떳하게 전 세계 원하는 곳이면 다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간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융자 자금은 거의 다 갚았다. 주문받은 제품이 제대로 나올 때까지 24시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 대표의 철저함과 강인함은 주위에서 인정을 해준다. 인터뷰 며칠 전에는 이 대표가 납품하는 부도 위기에 놓인 회사 사장이, 이 대표에게 그간 물건을 잘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본인이 너무 어려워 사업을 접을까도 생각했지만 이 대표를 보며 저렇게 힘들게 헤쳐 오며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좌절하지 말고 더 해보자며, 사업을 계속하기로 했단다. 임태희 이사장이 이 대표를 진심으로 배려한 것이, 한 여성을 살리고 중소기업을 살렸으며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물결이 널리 퍼지고 있다. 사업을 하면서도 직접 장도 담그고 살림하는 이 대표, 앞으로의 소원이 있다면 지금 있는 직원들이 할아버지가 되도록 공장의 숲을 같이 만들고 거래처와는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정을 주고받으며 사업하는 아름다운 주변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어디에선가 나처럼 굶주림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길잡이 역할도 자청한다. 발음도 정확하게 말도 잘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기자에게 힘들었던 여정을, 여유를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 놓는 이 대표, 먼저 주변의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할지 요즘은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이제는 소울림포럼을 통해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에 납품하는 것이 꿈이란다. 이 대표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옥화 대표는 한국에 와서 가장 기쁜 것이 자기 이름 석자로 떳떳하게 전 세계 원하는 곳이면 다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간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융자 자금은 거의 다 갚았다. 주문받은 제품이 제대로 나올 때까지 24시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 대표의 철저함과 강인함은 주위에서 인정을 해준다. 인터뷰 며칠 전에는 이 대표가 납품하는 부도 위기에 놓인 회사 사장이, 이 대표에게 그간 물건을 잘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본인이 너무 어려워 사업을 접을까도 생각했지만 이 대표를 보며 저렇게 힘들게 헤쳐 오며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좌절하지 말고 더 해보자며, 사업을 계속하기로 했단다. 임태희 이사장이 이 대표를 진심으로 배려한 것이, 한 여성을 살리고 중소기업을 살렸으며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물결이 널리 퍼지고 있다. 사업을 하면서도 직접 장도 담그고 살림하는 이 대표, 앞으로의 소원이 있다면 지금 있는 직원들이 할아버지가 되도록 공장의 숲을 같이 만들고 거래처와는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정을 주고받으며 사업하는 아름다운 주변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어디에선가 나처럼 굶주림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길잡이 역할도 자청한다. 발음도 정확하게 말도 잘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기자에게 힘들었던 여정을, 여유를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 놓는 이 대표, 먼저 주변의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할지 요즘은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이제는 소울림포럼을 통해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에 납품하는 것이 꿈이란다. 이 대표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