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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거제특집 - 사회복지법인 거제도 애광원

슈바이처 의료봉사의 아버지, 김임순 원장은 영혼의 어머니

[인터넷 대한뉴스]대담 김원모 대표|정리 박혜숙 기자 | 사진 이동현 기자

 

거제도 애광원 뜰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원모 발행인, 김임순 원장, 김윤옥 기자(왼쪽부터)

 

폐허 딛고 21세기 복지 모델로 우뚝 서다
원훈 ‘정직·부지런하고 깨끗하자’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 우뚝 섰다. 경제성장으로, 민주주의로, 스포츠로, 이제는 내가 하면 이웃에서 따라 하는 봉사정신이 빛이 되어 한국을 알리고 있다. 20세기 봉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작됐다면 21세기 봉사는 환경도 생각도 다르다. 매년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

 

이에 본지는 ‘제12회 사회복지의 날’을 맞이해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한 빛과 소금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재조명하는 특집을 마련, 사회복지관련 인사와 대우조선해양 정성대 홍보이사의 소개를 받아 첫 순서로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거제도 애광원(김임순 원장, 86)을 선정했다.

 

애광원은 오늘날 복지사들이 가장 가 보고 싶고 배우고 싶어하는 곳이며 과거 우리나라 경제, 문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1952년 설립, 내년이면 창립 60주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KBS, MBC 등 공중파 방송을 비롯하여 각 언론매체에 많이 보도되어 알 만한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김임순 원장은 여성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던 시절인 1940년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앞둔 재원으로서 앞날의 눈부신 번영을 뒤로하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봉사의 길을 택했다. 슈바이처가 의료봉사의 아버지라면 김임순 원장은 몸과 마음을 살리는 영혼의 어머니가 아닐까. 지난 8월 16일 오후 애광원 내 애빈하우스에서 김임순 원장을 만나 애광원의 사람들과 교육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복지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그때 그 시절 1950년대의 거제도
김임순 원장은 경북 상주가 고향이다. 1950년도 4월 말에 혼인하고 친정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갔다. 남편은 직장 관계로 먼저 서울로 떠났고 얼마 후 6·25전쟁이 터진다. 그 길로 남편과는 결혼 두 달 만에 영영 이별이 되었다. 구전을 통해 시어머니가 거제도로 오라는 소식을 듣고 1951년 8월경에 당도했다. 당시의 모습은 어땠느냐고 묻자 김 원장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고 회상한다.

 

사람들은 움막에서 아무 데서나 되는대로 살고, 피난민은 어찌나 많은지 길거리를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생활은 돈보다는 채소와 생선을 바꾸는 물물교환이었다. 피난민이 자기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집을 지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피난민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옥신각신 싸움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생활력 강한 피난민이 시장 상권을 쥐게 된다. 김 원장은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것이라며 거제도민은 굉장히 착한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애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나님 음성대로 평생 이웃을 위해 몸바쳐
교회에서 누가 김 선생! 하고 불렀다. 어떻게 나를 아세요? 하자 이화여대 나오지 않았느고 한다. 그는 보사부 분실장 김원규씨다. 서울서 왔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앞섰고 어디 좀 가보자고 하기에 안고 있던 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뒤따라 갔다. 꼬부랑꼬부랑 길을 걸어 마치 박아지 엎어 놓은 것처럼 굉장히 높은 언덕을 올랐다.

 

거기서 가마니때기 문을 여니 갓난아기 7명이 미군 담요에 똘똘 말려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를 봐달라는 말에 몇 시까지냐고 하자, 전쟁 통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어디냐며 무척 화를 낸다. 안된다고 말하는데도 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김 원장은 “왜 이 비참한 아이들을 내가 봐야 합니까. 대학까지 공부하고 이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다른 것 하게 해주시면 어떤 일도 감당하겠습니다”라고 밤새 기도를 했다. 새벽종 소리에 잠이 깨서 몸을 바로 세우려는데 하나님 음성이 들렸다 “왜 아이들 수준으로 떨어지려고 하느냐,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려라”라는 소리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평생토록 아이들과 살겠다며 무릎을 꿇었다. 27세 때의 일이다.

 

 

에덴동산 애광원의 탄생
애광원은 장승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해가 다른 곳보다 30분 일찍 떠 가장 먼저 빛을 받는다고 한다. 구호단체에서 언덕 아래에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작물을 심을만한 곳이 못 되어 싫다고 하니 도움의 손길을 끊었다. 밭주인을 찾아가 천막을 치려고 하니 땅을 빌려달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빌려 달라는 말조차 없는데 새댁이 가엾다며 한 해에 알랑미 한 포대를 주고 빌리게 된다.

 

참 이상한 게 아이들이 마늘밭을 망가뜨려 주인에게 물어내려고 찾아가면 고마 우리 땅 사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평 두 평 사들인 것이 4만 평 보금자리가 되었다. 소나무 외에는 삼나무, 편백나무 등 젓가락 만한  것을 손수건에 싸와 심은 것이 숲을 이뤘다. 아기들에게는 보사부에서 주는 스킨밀크와 얻어온 콩으로 두유를 만들어 먹였다. 김 원장의 젖은 돌도 안된 친딸보다는 다른 아기에게 더 많이 물렸다.

 

6·25 이후라 3남매, 4남매 형제 고아들이 많았다. 고아원에서 살면서 아가 동생이 보고 싶어 문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김 원장은 고아원 원장들과 협의를 했다.  그렇게 남매들까지 거두니 영아원에서 고아원이 됐다. 성인이 되어 정상인은 떠나고 장애인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정신지체아와 중증장애인을 위한 치료 및 교육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복지시설 중 하나이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1년 9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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