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닢에 눈이 멀어 스승인 예수를 배신한 유다,
모두가 스승을 배반해도 결코 자신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국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지만 권력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권력자 빌라도,
예수님이 예수살렘에 입성할 때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면서 환영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예언하는 장면부터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고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가 합창과 아리아로 펼쳐지는 것이 바로 전곡 78곡, 총 연주시간이 3시간이 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다.
1729년 성금요일 라이프찌히 성토마스 교회에서 3년만에 완성된 마태수난곡이 바흐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바흐 사후 연주되지 않고 잊혀졌지만 100년 후 멘델스존이 스승이 보관하고 있던 악보를 다시금 발췌해 2년여의 연습기간을 갖고 합창에 무려 400명을 동원해 다시금 세상에 알렸다.
회개와 인내, 절제와 금식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기억하는 바로 부활절 전 6주간의 사순기간, 부활절을 열흘 앞둔 16일 예술의 전당에서 바흐가 초대 칸토르로 있었던 성토마스교회 합창단과 100년 후 멘델스존의 지휘로 마태수난곡을 세상에 부활시킨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 이들이 함께 연주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전곡연주회가 있었다.
지휘자는 성토마스교회 17대 칸토르인 고돌트 슈바르츠, 성토마스합창단의 선배로 지휘, 오르간, 성악을 전공한 교회음악가다.
11세부터 19세까지의 소년, 청소년으로 구성된 합창단원이 50여명, 오케스트라도 50여명, 솔리스트 6명과 지휘자까지 100명이 넘게 ‘마태수난곡’을 위해 무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3층 객석은 교회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스코어까지 준비해 연주내내 공부하는 분위기로 숨소리도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1부에서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다소 산만하고 연주자들의 움직임이 너무 커 집중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또 솔리스트들의 아리아가 현악기의 사운드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은 정도였다. 마태수난곡에서는 솔로들의 아리아가 다른 현이나 관악기와 듀엣을 이룬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솔리스트들의 사운드에 따라 강약조절이 필요한데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복음사가역의 벤야민 부룬스의 목소리는 성서를 너무나 부드럽게 읽어내려가듯 노래하는 것이 정말 대단했다. 교회음악에서는 드라마틱한 성악가들을 솔리스트로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 들을 때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린이들의 숙련된 합창발성과 어울림을 아주 중요하게 봐야한다. 이날 여자 솔리스트들도 예술의 전당이 아닌 작은 공간의 연주홀이었다면 많은 감동을 주었을 수도 있다. 2부에서는 합창단원들도 정리가 된 듯한 느낌이었고 오케스트라 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류트와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는 바로크 활을 쓰지 않은 현악기들의 소리에 고악기의 깊은 울림을 더해주었다.
목관악기도 트라베르소 플루트(나무플루트)을 사용해 소프라노 아리아와 함께 목관의 부드러움을 들려주었다.
중간 중간 반복되는 아이들의 코랄은 솔리스트들에 대한 아쉬움을 잊게 해주었고 중간에 예수를 살려줄까, 바라바를 살려줄까 묻자 군중 역할의 합창단의 ‘바라바’ 짧게 외치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고 마지막 피날레의 합창인 ‘우리들은 눈물 흘리며 무덤의 그대를 부르노니 편히 잠드소서’는 과연 800년 전통의 성가대다웠다.
3시간여의 공연이 끝나자 지난 내한 공연때처럼 ‘브라보’를 외치는 실수는 없었지만 지휘자가 팔을 내리기도 전에 일부 관객이 박수를 쳤다. 수난곡의 연주 후에는 박수를 치지 않고 여운을 간직하는 것이 예의지만 마태수난곡 전곡을 최고의 조합으로 훌륭히 마친 성토마스 합창단원들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