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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토막상식

다섯 명이서 혁명의 과업을 이루다
가장 적은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왕은?

 

 

역사는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도, 한 개인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 속 여러 가지 총체적인 사건과 모습들이 어울려져 만들어낸 시간의 산물이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역사 토막상식을 살펴봤다. 요즘 계엄령 선포와 관련하여 연일 나라가 시끄럽다. 조선 시대에 가장 적은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왕은 누구였을지 궁금하다.

 

쿠데타 성공의 핵심은?

 

쿠데타라고 하면 군대만 확보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쿠데타에 있어서 병력은 중요한 요소이다. 쿠데타의 정의가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인 정치활동“이라고 한다. 쿠데타에서 군대는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그러나 과연 군대만 있다고 쿠데타가 끝나는 것일까? 군대만 있다고, 병력이 많다고 쿠데타를 성공하는 건 아니다.

 

쿠데타 성공의 핵심은 ‘포스트의 장악’이다. 권력이 나오는 핵심 포스트를 장악하면 쿠데타는 성공한다. 따라서 포스트를 장악하는 데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TV 사극에서 보아왔던 조선시대의 혁명은 수천 명의 병사를 끌고 와 궁궐을 장악하거나, 거대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실제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몰고 와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거의 대부분이 궐기를 하는 순간 혁명의 성패는 결정이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고, 천 단위의 병사들이 모두 필요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길거리 양아치들 몇 명을 포섭해서 나라를 전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병력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쿠데타의 생명은 보안인데, 보안은 인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조선대에 있었던 다섯 번의 쿠데타 - 태조의 위화도 회군, 인조반정, 제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가운데 가장 적은 병력으로 쿠데타를 성공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는 결정적 사건 계유정난은

5명으로 성공한 쿠데타

 

계유정난은 조선 초기, 1453년(단종 1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이며 조선의 왕 단종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수양대군이 활 쏘는 것을 핑계하고 멀찌감치 무사 등을 이끌고 후원 송정에 이르러 말하기를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다.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송석손, 유형. 민발 등은 수양대군 옷을 끌어당기면서 두세 번 만류했다. 이에 수양대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라며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다. “지금 내한 몸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자는 가라. 나는 너회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일을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라고 했다.

 

혁명을 하겠다고 병사들을 모았더니 혁명을 하지 말자며 수양대군의 팔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모습이다. 말리는 자들은 바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무사들이다. 사실 이들은 무사라기보단 뒷골목 양아치가 더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이날도 수양대군 집에서 활이나 쏘며 술이나 한 잔 얻어 마시려고 모인 거였는데 난데없이 혁명이란 것을 하자니 다들 바짝 얼어서 수양대군을 말린 것이다. 이들이 바로 계유정난의 핵심 세력들이었다.

 

다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살펴보자. “중문에 나오니 수양대군 부인 윤씨가 갑옷을 끌어 수양대군에게 입히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노비 임어을운 한 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수양대군이 떠나기 전에 권남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 뒤에서 도와줌)이 없을 수 없다.”라며 권언, 권경, 한서구, 한명진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 안 내성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 홍순손, 유서에게 경계하여 미복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아무도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수양대군의 부인 윤씨는 갑옷을 가져와 수양대군의 기분을 맞춰줬다. 그 덕분인지 용기가 생긴 수양대군은 데리고 있던 노비 임어을운 한 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이에 권남과 한명회는 아무래도 두 명만 보내기에는 불안했던지 양정 등 3명을 따라가게 만든다.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김종서 제거에 수양대군 포함하여 5명이 덤벼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성공하게 된다.

 

자료 출처 : 조선랭킹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