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거제 저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저도는 국방부 소유의 군 휴양시설로 1954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휴양지가 되었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별장인 청해대로 지정되었으나 1993년 다시 국방부 소유가 되었다.
서울극장은 단성사와 피카디리, 허리우드, 국도극장, 대한극장 등과 함께 우리나라 70년대 영화관 전성기를 이끌었던 극장이다. 서울극장은 1989년에 상영관을 3개관으로 늘려서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라는 타이틀도 지니고 있다.
1975년 6월 15일 미국 40사단장 터니지소장을 비롯한 6·25참전용사 51명은 25년 만에 격전지 한국을 다시보기위해 김포 비행장에 내렸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들 참전용사들은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고 영친왕 이은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황족 출신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다. 조선 왕통의 계승자이던 영친왕은 일본군 장교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영친왕은 왕족 신분을 박탈당했다. 영친왕은 1945년 광복 직후, 1948년에 두 차례나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고국을 떠난 지 56년만인 1963년 11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영친왕은 환국 할 수 있었다. 이미 지병으로 반신불수의 몸상태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영친왕은 7년간의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조선호텔은 1914년 서울 소공동 106번지에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이 자리에 일제가 세운 호텔이 조선호텔이다. 1920∼30년대 조선호텔은 모던 보이의 사교장이였으며 ‘수직열차’라 불리던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국내 최초로 운행했다. 서구식 결혼식, 댄스파티, 아이스크림도 조선호텔이 처음으로 선보이며 유행을 선도했다. 광복 직후 조선호텔은 미군 24사단 고위장교 숙소가 되기도 했다. 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호텔 재건축을 지시했다. 67년 정부는 미국 기업(아메리칸 에어라인)과 합작으로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3년의 공사 끝에 조선호텔은 70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됐다.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사람 인(人) 자처럼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김봉래 선수가 한국마라톤의 꿈이던 20분벽을 깨뜨리고 골인했다. 그의 기록은 2시간 19분 7초였다. 이후 이홍열 선수가 1984년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4분 59초로 10년 만에 한국기록을 깨며 침체기에 있던 마라톤계에 희망을 안겨주었다. 황영조 선수는 1992년 벳부-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로 준우승하며 새로운 한국기록을 세웠고 현재 최고기록은 이봉주 선수가 가진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 다.
1970년 3월 30일 9명의 일본 적군파가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JAL)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다.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15명이 타고 있었고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해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범인들은 북한으로 가던 중 3월 31일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뒤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결국 김포공항에서 범인들은 한국정부의 설득으로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고 79시간 만에 북한으로 떠났다. 그 후 평양에 도착 후 납치범들을 내려놓고 하네바 공항으로 돌아왔다.
(대한뉴스 조선영 기자)=정부의 인력수출방법의 하나로 추진해온 광부 서독파견이 실현되어 그 제1진 123명이 63년 12월21일 떠났다. 이들은 서독에서 일하며 성실한 한국민의 이미지를 심어 국위를 떨쳤다. 이것을 처음으로 하여 광부들의 서독진출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