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북측 대표단의 아산 현충사 방문(72. 9. 14) 1945년 이후 국토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며 한반도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남북 적십자회담은 국토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 이루어진 남북대화라는 벅찬 감격과 기대 속에서 본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7차례 개최됐다. 그러나 남측은 ‘가족찾기’ 사업 등 순수한 실질적 관계개선을 추구한 반면, 북측은 주체사상과 김일성 찬양 등 정치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 끝내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진은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에 참가한 북측 대표단이 충남 아산 현충사를 방문한 모습이다.
베트남에 파병된 청룡 포병대대는 대민 이발 및 의료 봉사활동도 펼쳤다(69.7.24).
1950년 ‘대전협정’의 불평등성을 보완한 한미협정(한미행정협정) 조인식(66.7.9)
한강 홍수로 건물 등이 한강철교를 향해 떠내가고 있다(65.7.19).
이기붕 국회의장이 기자회견에서 정‧부통령이 같은 정당에서 선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59.7.17).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남과 북은 1960년대까지 국제적 냉전의 영향 아래 대화에 나서지 못하다 1970년대 들어 국제사회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도래하자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1972년 5월 남북 대표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가진 결과, 분단 이후 최초 합의문서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성명에서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원칙을 비롯하여 상대방 중상 비방 중지, 군사충돌 방지 조치, 서울-평양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을 합의했다. 그러나 냉전체제를 기반으로 한 적대적 대결구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남북관계 진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이승만 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이 대통령은 6.25전쟁 휴전 이후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안을 논의하자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수락해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연 뒤 미국 상하 양원합동회의 연설과 UN본부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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