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이정영 기자, 제공 박인수 교수 공연을 마치고 평생 고마운 아내 안희복 교수와 함께 내적 성숙도는 소리로 연결되며 청중에게 감흥이 그대로 전달된다. 진실한 말이 상대를 움직이듯이 음악가의 내적인 에너지가 어떤 색을 띠느냐에 따라 소리도 달리 전달된다. 박인수 교수는 타고난 감성과 부단한 노력으로 득음의 경지를 꿈꾸는 세계적인 테너다. 조선일보에서 5월 16일 ‘테너 박인수의 삶과 음악' 출판기념회 기사를 보았다. 음반은 10여 장 냈지만 책 출간은 처음이다.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박인수 교수와 미아리 삼총사인 최성균 한국사회복지미래경영협회 회장이 행사를 주관하며 공연을 부탁했었다. 그날도 역시 많은 제자들과 함께 무대를 훌륭하게 꾸며주었다. 너무나도 얇은 감사의 봉투를 건네는데 전혀 개의치 않으며 한 말씀 했다. “최 회장과 나는 각별한 사이야. 얼마든 상관없어.” 기본이 갖추어졌기에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 사는 도리를 알며 실패를 당당히 인정한다. 대한민국 음악 크로스오버의 원조다. 그의 제자 20여 명이 대학 강단과 세계 5대 메이저 오페
[인터넷 대한뉴스] 글 박현 기자 | 사진제공 (사)자유수호국민운동 평양에서 열린 군중집회. 대한민국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북한노동당의 의도가 담겨 있다 (사)자유수호국민운동을 이끌며 북한 노동당정권의 반민족적 범죄행위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국가안보 확립와 종북세력 척결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장경순 총재. 그는 6·25전쟁과 월남 패망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고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지켜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해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공갈'과 ‘협박'을 바탕으로 한 북한의 대남적대정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차에 걸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국내외의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갖가지 트집으로 남북대화를 무산시켰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라오스에 숨어지내던 탈북자 9명의 강제북송으로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동시에 신임 박근혜 정부에 대한 중상모략과 비방의 정도를 높여가고 있다. 북한의 파렴치한 행태는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은 시민단체를 결성,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음모와 도발을 규탄하는 활동을 펴고 있다. 장경순(91) (사)자
[인터넷 대한뉴스] 글 박혜숙 기자 | 사진 편집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계속된 6·25전쟁. 2013년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민간이 앞장서서 한반도 평화의 횃불을 당기는 가운데, 지난 2010년에는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 ‘은혜를 잊지 않는 대한민국’ 보은공연이 있었다.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는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의 눈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의미를 살펴본다. 총 한 번 쏴 보지 못하고 전투에 나서다 박보희 총재는 1930년 충남 출생.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2기로 입교했다. 그것은 ‘육군사관학교 4년제 사관생도’의 첫 출발이나 다름없었다. 입교 25일 만에 6·25전쟁이 터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를 포함한 젊은 청춘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제대로 된 훈련은커녕 총 한 번 쏴보지 못하고 북으로부터 밀려오는 탱크에 맞서 포천전투에 나서 육탄전으로 막아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이후 1952년 미국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에 유학, 1956년 UN군 사령부내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 등 육
부처 성지 네팔 룸비니 평화의 불을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으로 봉송해와 한반도를 영원히 밝히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 선묵혜자스님은 평화의 불을 람 바란 야다브 네팔 대통령에게 전달받아 18일간 구법순례 길을 밝혔다. 평화의 불은 임진각 평화누리광장에서 종교를 초월하여 남북평화 정착을 기원한 후 도선사에 영구 보존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선묵혜자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순례기도회는 부처 사상의 중요 설법인 평화와 자비정신에 따라 남북의 화합과 평화 통일을 발원하며 지난 4월 18일 부처 탄생 성지 네팔 룸비니에서 순수한 네팔 정부의 큰 관심 속에 ‘평화의 불’을 채화했다. 네팔 대통령궁에서'평화의 불'을 전달받고 있다. 일반인은 평화의 불을 왜 가지고 오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것이다. 선묵혜자스님이 네팔, 중국 관계자들과 수십 차례 전화 연결과 발품을 팔며 원력을 모아서 평화의 불을 가져오는 과정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글 싣는 순서는 1부 네팔 동행 취재, 2부 임진각 평화누리광장 평화기원법회와 삼각산 도선사 안착 및 점화식, 3부 선묵혜자스님에게 듣는 특별 인터뷰로 엮었다. ■ 1부 - 네팔 룸비니 ‘평화의 불’
[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진솔한 언어로, 모금의 대가 이윤구 교수 사회 곳곳에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보이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다. 예수의 멍에를 마치 자신이 진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어려운 이들을 보며 가슴앓이하는 지도자가 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고 기독교계와 사회복지계에서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이윤구 교수. 발로 뛰며 진심어린 말로 사람을 감화시켜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룬, 눈물도 많고 전하고 싶은 말도 많은 원로다. 매년 들어오는 100만 달러(당시 환율 9억 원)로 한국의 어려운 곳에 적절히 분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윤구 월드비전 회장(1991~1996년)은 사서 고생을 했다. 원조 들어오는 계좌를 없애버리고 모금운동에 뛰어들어 1991년 원조 받던 금액인 100만 불 모금에 성공했다. 그에 더해 100만 불 해외원조도 해냈다. 30여 년 간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과 간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그가 무소유를 실천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가로 만들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지금도 이 교수가 관여하는 단체에서는 사랑의 빵이 두만강을 넘어 현지로 들어가고 있
[인터넷 대한뉴스] 글 이선아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김기제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은 “국민이, 국가가 6·25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6·25참전용사 중 18만여 명(2013년 기준)의 용사들이 생존해 있지만 매년 1만 명씩 줄고 있는 것이 현실. 대부분 80세 이상의 고령자인 데다가 나라에서 나오는 명예수당마저 적어 생활조차 녹록치 않은 참전용사도 있다. 김기제(84) 서울시지부장과 이동진(82) 서울시지부 감사, 장인준(82) 서울시지부 감사를 만나 6·25전쟁의 참혹함과 현 처우에 대해 들어봤다. 전쟁이 다시 난다고 해도 일어설 힘만 있다면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80세가 넘은 노장(老將)들은 63년 전 그날을 회상하며 투혼을 불태웠다. 거동이 어려울지언정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조국을 위해 전선으로 달려가겠다는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과연 이들의 희생에 걸맞은 대우를 하고 있을까. 현재 6·25참전 유공자들이 받고 있는 참전 명예수당은 월 15만 원이다. 그것도 2000년 월 6만 원부터 시작해 지난해 12만 원, 올해 15만 원으로 겨우 인상된 금액이다. 잊혀가는 전쟁 그리고
[인터넷 대한뉴스] 글 박혜숙 기자 | 사진 편집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계속된 6·25전쟁. 2013년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민간이 앞장서서 한반도 평화의 횃불을 당기는 가운데, 지난 2010년에는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 ‘은혜를 잊지 않는 대한민국’ 보은공연이 있었다.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는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의 눈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의미를 살펴본다. 총 한 번 쏴 보지 못하고 전투에 나서다 박보희 총재는 1930년 충남 출생.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2기로 입교했다. 그것은 ‘육군사관학교 4년제 사관생도’의 첫 출발이나 다름없었다. 입교 25일 만에 6·25전쟁이 터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를 포함한 젊은 청춘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제대로 된 훈련은커녕 총 한 번 쏴보지 못하고 북으로부터 밀려오는 탱크에 맞서 포천전투에 나서 육탄전으로 막아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이후 1952년 미국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에 유학, 1956년 UN군 사령부내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 등 육
[인터넷 대한뉴스] 글 이선아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김기제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은 “국민이, 국가가 6·25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6·25참전용사 중 18만여 명(2013년 기준)의 용사들이 생존해 있지만 매년 1만 명씩 줄고 있는 것이 현실. 대부분 80세 이상의 고령자인 데다가 나라에서 나오는 명예수당마저 적어 생활조차 녹록치 않은 참전용사도 있다. 김기제(84) 서울시지부장과 이동진(82) 서울시지부 감사, 장인준(82) 서울시지부 감사를 만나 6·25전쟁의 참혹함과 현 처우에 대해 들어봤다. 전쟁이 다시 난다고 해도 일어설 힘만 있다면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80세가 넘은 노장(老將)들은 63년 전 그날을 회상하며 투혼을 불태웠다. 거동이 어려울지언정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조국을 위해 전선으로 달려가겠다는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과연 이들의 희생에 걸맞은 대우를 하고 있을까. 현재 6·25참전 유공자들이 받고 있는 참전 명예수당은 월 15만 원이다. 그것도 2000년 월 6만 원부터 시작해 지난해 12만 원, 올해 15만 원으로 겨우 인상된 금액이다. 잊혀가는 전쟁 그리고
[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진솔한 언어로, 모금의 대가 이윤구 교수 사회 곳곳에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보이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다. 예수의 멍에를 마치 자신이 진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어려운 이들을 보며 가슴앓이하는 지도자가 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고 기독교계와 사회복지계에서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이윤구 교수. 발로 뛰며 진심어린 말로 사람을 감화시켜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룬, 눈물도 많고 전하고 싶은 말도 많은 원로다. 매년 들어오는 100만 달러(당시 환율 9억 원)로 한국의 어려운 곳에 적절히 분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윤구 월드비전 회장(1991~1996년)은 사서 고생을 했다. 원조 들어오는 계좌를 없애버리고 모금운동에 뛰어들어 1991년 원조 받던 금액인 100만 불 모금에 성공했다. 그에 더해 100만 불 해외원조도 해냈다. 30여 년 간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과 간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그가 무소유를 실천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가로 만들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지금도 이 교수가 관여하는 단체에서는 사랑의 빵이 두만강을 넘어 현지로 들어가고 있
[인터넷 대한뉴스]글 전 MBC 편성국장 신준우 | 사진 홍성준 기자, 연합뉴스 얼마 전 MBC 입사동기생 정문수 PD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왔다. 많은 동기생이 모였다. 일찍 고인이 된 그는 실력이 걸출하고 의리 있는 사나이였고, 수준 높은 드라마를 많이 연출했다. 부인 배귀숙 씨도 동기생이었다. 양주 불곡산 자락 자택에도 초대받아 갔는데 아쉽기만 하다. 예식장이어서 서로 말을 아꼈지만, 과거 추억을 떠올리며 오늘의 방송 현실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역사가 힘이다” 1969년 8월 TV 개국을 앞두고 1기생이라는 자부심과 책임의식이 강했던 시기였다. 눈비를 맞으며 남산 송신소까지 걸어 올라가 ‘시험방송’을 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벌써 2012년도 연말이다. 지난 1년 동안 큰 틀에서 방송계를 돌아보면 종편방송의 치열한 경쟁을 경험했고, 19대 총선과 런던올림픽 중계방송에 이어 18대 대선을 치렀다. MBC, KBS, YTN 방송 파업이 있었다. 지금은 외형상 방송사들이 제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고 새해를 맞고 있다. 나는 용인 산골에서 산다. 이제는 방송을 방송 (放 )하며 되도록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