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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김원모 발행인의 아름다운 인연 - 14 한기옥 도예가

발행인이 상당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한기옥 도예가와 인연 시작

[인터넷 대한뉴스] 글·사진 김윤옥 기자

 

 



대통령 선거가 오는 19일이다. 발행인의 아름다운 사람들 인연을 따라가다 보면 곧 다가올 2012년 대선과 비교하여 1980년대 선거운동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7년 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발행인이 상당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한기옥 도예가와 인연이 시작됐다. 한 도예가는 경기도 광주에서 청담   5대째 도예 가업을 잇고 있었다.

 

광주는 조선 초기 왕실에서 질 좋은 백자를 다량으로 확보하기 위해 왕궁과 가깝고, 수목이 무성하여 땔감의 조달이 유리해 많은 관요를 설치한 도자에 관해 유서 깊은 곳이다. 한 도예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부친 청담 4대 故한창문 옹은 영남대학교에 도예과를 설립한 주인공이며, 1984년 일본 오사카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 ‘아사히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을 정도로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국보급 대가이다. 그는 부친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쌓았다. 당시 클럽 사장인 발행인과 아버지 밑에서 도예가 수업을 받던 한 도예가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본다.


지갑 찾아주고 뺨 맞아
 
발행인은 자신의 사업장 화장실에서 지갑을 주었다. 그 안에는 신분증과 현금 285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단돈 몇 십 만원이 없어 전당포에 드나들던 때에 발행인은 거금이 들어 있는 지갑을 보자 욕심이 났다. 본 사람도 없고 돈도 궁하던 때 이 돈이면 당장 급한 것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구겨진 돈을 보니 한 장 한 장 사연을 담고 여기저기서 수금한 돈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어렵게 모인 돈일까 짐작되자 그 돈의 주인을 찾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기 마음도 때로는 못 다스리고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에 바로 경기도 광주시 동부읍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어디 클럽의 사장이라며 주운 지갑을 신고부터 했다.

 

얼마 후 싸우는 소리가 들려 사업장에 내려가 보니 한 손님이 무전취식으로 종업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그 취객이 바로 지갑 신분증에서 본 주인공이 아닌가. 발행인은 그와 함께 파출소로 가자고 했다. 그는 “내가 집에 가면 술값을 줄 수 있는데 왜 파출소로 가자고 하냐”며 막무가내로 버티며 발행인의 뺨까지 때리는 것이었다.

 

발행인은 순간 지갑을 주고 술값만 받을까 했지만 그가 많이 취하기도 했고 같이 술 마신 사람 면면을 보니 지갑의 그 많은 돈을 제대로 간수 못할 것 같아 억지로 파출소까지 데리고 갔다. 파출소로 들어서자 소장은 취객에게 말했다. “아니! 자네 한창문 선생 아들 아닌가! 내가 자네 결혼식 때 가서 축하해줬는데 알아보겠는가!”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취객이었던 한기옥 도예가는 부인과 친구를 대동하고 발행인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인연이 되어 어느덧 근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당시 발행인은 어떻게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왜 어려움을 겪었는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본다.

 

팔자에 없는 나이트클럽 사장 되다

 

제5공화국이 출범되던 시절 발행인은 1980년대 초 용두동 태양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때 임채수 중앙일보 차장(현 중앙경제신문 회장)이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김 대감! 요즘 힘 많이 빠졌지”라며 말문을 열더니 “낮에 하는 카바레가 있는데 허가가 죽었어. 허가를 다시 내야겠는데 할 수 있을까?”

 

임채수 차장이 말하는 카바레는 경기도 하남시 신장읍에 있었으며 낮에 영업을 하다 면허가 취소되어 3개월째 문을 닫자 임채수 차장이 전두환 대통령과 친척이라는 건물주인과 함께 발행인을 찾아와 상의했다. 면허가 취소된 후 일 년이 지나야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임채수 차장은 “다시 허가를 낼 수 있으면 허가를 내고 발행인이 2,000만 원 만 투자하면 한 달에 1,000만 원 씩 줄 수 있다”고 권유를 했다. 그런 후 건물주는 카바레 내부 시설 가운데 ‘돌아와요 부산항에'노래를 부르면 배가 지나가는 최신식 시설을 1억5,000만 원을 들여 꾸몄는데 그 시설을 발행인에게 준다고 하기에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았다.

 

발행인은 앉아서 매달 1,000만 원 받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기에 다른 세 명과 동업하기로 했다. 발행인은 시설허가를 받고 2,000만 원 투자하고 다른 세 사람은 5,000만 원씩을 투자하기로 하고 발행인 이름으로 나이트클럽을 계약하라기에 그렇게 했다. 그런데 막상 허가 받고 영업을 하려니 동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약금이 떼일 위기에 처하자 발행인은 어쩔 수 없이 잔금을 넣고 팔자에 없는 술집 클럽 사장이 된 것이다. 

 

어려움 속의 어려움

 

클럽 사장이 된 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세 명이 동업하기로 하고 발행인은 2,000만 원만  투자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후 1억 5,000만 원을 더 투자하고도 계속해서 나가야 될 돈, 책임질 돈이 있어 매우 힘들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이트클럽 규모는 300백여 평이었는데 내부에 90개의 스탠드바를 만들어 각 바의 운영자 및 관리원 등 100여 명의 사람을 고용했다. 헌데 직원들은 발행인을 클럽에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물쇼, 스트립쇼 등을 했었는데 발행인이 법에 어긋나는 것을 금지하자 직원들이 발행인을 못 내려오게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관리를 하는 지배인이 정직하지 못하고 뒷거래하는 것을 알고는 그만두게 하자 종업원의 90%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클럽 문을 십여 차례 열었다 닫았다 했으니 클럽이 잘 됐을 리가 있을까. 꾸준히 해도 손님이 있을까 말까한데 툭하면 문을 닫아버리니 잘될 턱이 없었다.

 

3년 동안 몇 억원 투자하고 나올 때는 10원 하나 못 건지고 나왔다. 문을 닫은 이유는 대한뉴스 2012년 4월호 인연(6) 주유식 형님 편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당시 직원이 마약과 관련하여 문을 닫고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밥 한 끼 안 준다고 대통령 후보 물러가라 시위하던 군중들  

 

클럽 운영에 돈은 계속 들어가고 본전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민정당 청년분과위원장을 맡은 구천서(자민련 원내 총무 역임, 현 신촌개발 회장)의원이 발행인을 찾아왔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 박수부대를 동원해달라는 것이다. 발행인은 석촌호수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던 친구 정기춘(현재 이명박 대통령 비서실 1호차 운전기사)에게 부탁하여 석촌호수를 비롯한 인근 포장마차의 사람들을 한강으로 모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안 되고 청년만 된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청년분과위원회에서 청년만 모집한다는 것을 모르고 사람을 모으라니 남녀노소 다 모집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모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일당을 주어야 하기에 많은 돈을 발행인이 물어내고 청년만 수원 집회장으로 이동시켰다.

 

수원 집회장에서는 점심을 각자가 알아서 먹으라고 하자 노태우 후보를 응원하러 갔던 박수부대가 이번에는 반대로 노태우 물러가라며 난리를 피우게 되었다. 발행인은 또 돈을 물어내게 생겼다. 수원 집회장에 갈 때 사람의 숫자와 끝나고 돌아올 때 숫자가 같아야 돈을 준다는 것이다. 아침에 왔다가 간 사람들은 발행인을 찾아와 돈을 달라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신발에 인분을 묻혀와 클럽 안 카펫에 문질러 대니 그 냄새가 지독했다. 또 발행인을 힘으로 밀어 부쳐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정치 유세판에서 구천서 당시 청년분과위원장과의 의리를 앞세워 도우려 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일이다. 후에 발행인은 구천서 위원장을 찾아 갔지만 밑의 사람의 저지로 만나지 못하고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의 인건비만 받았다.

 

그런 와중에 힘들어도 몇 년씩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을 기다리는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부활교회 식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기도 하남시 서부면에 있는 이 시설은 비닐하우스에서 현재의 시설로 지어질 때까지 발행인이 후원을 하고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인연'에서 많은 사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다녀간 사람이 많지만 발행인이 결혼으로 맺어준 장애인 부부들이 아직 기거 중이다.

 

세월이 깨닫게 해준 것들

 

발행인은 그때 클럽 허가가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고 한다. 면허 정지가 되면 일 년이 지나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허가가 났던 것이다. 젊은 혈기에 힘자랑(잘난척)하는 차원에서 한번 허가를 내보겠다며 나선 것이 허가를 받았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어려움에 빠진 것이다. 깨달음도 많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술장사가 아닌가 싶다.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발행인은 이번 기회를 통해 중앙경제신문 임채수 회장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그 사람 때문에 클럽을 인수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사이가 서먹했고 많이 미워했었다. 그런데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힘자랑 한 것도 자신이고 욕심 부린 것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발행인이 오늘날 도예문화에 푹 빠지게 된 사연을 이렇게 회상한다. 안주거리 살 돈 30여만 원이 없을 정도로 급했는데 만약 한기옥 도예가의 돈 285만 원을 그냥 썼더라면 오늘날 도예문화에 대해서 알 수 없었고 청담 한창문 선생의 작품도 소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힘자랑과 객기는 부질없는 짓이며 선거판에서는 어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선거판에서의 벼슬은 선거가 끝나면 미련을 버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기옥 도예가, 발행인의 귀한 조언 한 귀로 흘려 낭패 보다

 

한 도예가의 말이다. “20여 년 전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출입 기자로 있던 발행인은 경찰청 로비에서 아버님의 전시회도 열어주고 쁘렝땅백화점(을지로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없어짐)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하도록 주선해 주었죠.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아버님 한마디에 발행인은 아무런 경험이 없으면서도 선뜻 나서서 도와주셨어요.

 

경찰청 전시회 때는 작품이 어느 정도 팔렸는데 쁘렝땅백화점에서는 마지막 날까지 작품 한 점 안 나갔어요. 발행인이 큰일 났다 싶으셨는지 지인(현 세계한민족평화통일협의회 총재 김재천)에게 전화해서는 1억7,500만 원에 작품 전부를 사가게 하셨죠. 당시에는 3,000만 원이면 집 한 채를 사던 때입니다. 그 이후 아버님은 발행인이 이야기하면 작품을 다 만들어 주셨죠.”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비롯하여 발행인과 한 도예가는 남다른 우정으로 가깝게 지냈다.

 

발행인은 도자기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아들 때문에 청담 한창문 선생을 알게 되고 도예문화에 관하여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 도예가는 “어떤 사람이 아버님의 기념관을 지어준다고 했을 때 형님이 낌새가 이상하다며 제게 4억 원을 주시며 그 땅의 명의를 다시 제 앞으로 하라고 하셨죠.

 

그때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 땅 시세가 100억 원이 넘습니다. 무엇에 홀렸는지 그 사람이 오히려 형님이 사기꾼 같다며 만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믿고 제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죠.” 안타까움에 발행인이 말한다. “돈도 돈이지만 그 터는 육영수 여사가 일본에 갔을 때 한창문 옹의 사발을 귀히 여기는 일본 정부 관료를 보고는 한국에 돌아와 수소문해서 찾아간 곳이고 전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이 도예도 배우고, 이방자 여사도 그곳에서 난을 치곤 했던 많은 문화인들이 다녀간 곳이지. 5대째 내려오며 흙과 평생을 살아 온 우리 조상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도자기를 굽던 문화적인 곳인데 자네가 지키지 못했으니 많이 아쉽지.” 이야기 도중 발행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기자에게 “형님한테 찾아오고 싶어도 미안한 생각에 마음만 있지 못 왔습니다.

 

지금까지 형님은 저희가 지내는 집 근처를 지날 때면 전화를 주시고 아버님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도 ‘꿈에 아버님이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냐'며 정신이 없어 부고도 못 띄웠는데 장례식장에 오셨었죠. 아내와 자주 형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셨는데 아주 남자다우면서도 정이 많고 따뜻한 분으로 온화하면서도 무서울 때도 있고….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많은 분입니다”라고 두 내외는 말한다.

 

기자 뒷말

 

한 도예가의 명함을 받으니 예전 발행인이 사진기로 ‘이중 촬영'하여 도자기 안에 아버님과 한기옥 씨를 넣은 사진을 아직까지 명함에 쓰고 있다. 발행인의 사진 기술과 어려운 사람을 잊지 않고 챙기는 모습을 역시 이번 인연 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은 지갑 안에는 어려울 때 큰 도움이 되는 금액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도 못 믿어 먼저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신고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니 예전 남의 돈을 줍고는 기뻐하던 내 모습이 반성이 된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 없이 인연을 소중히 만들어 가는 발행인. 뭔가는 이익이 있어야 관계를 형성해 가는 요즘 세태에서 상대가 잘되면 떠나고 어려우면 도와주는 마음자리를 가진 발행인이 진정한 부자가 아닌가 싶다. 두 내외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발행인과 잊지 못할 많은 추억 가운데 한 가지를 이야기하겠다”며 “아주버님 때문에 알게 된 이종무(대한뉴스 10월호 인연 주인공)와 김광인의 처 그리고 저, 세 사람이 동시에 임신해서 배가 많이 불렀을 때 아주버님께서 계곡에서 손수 백숙을 끓여주셨어요.

 

지금도 그 맛과 즐거움을 잊지 못합니다. 그 때 뱃속에 있던 아들이 지금 27살입니다. 세월 참 빠른 것 같아요. 미안한 것도 많고 김원모 회장님은 저희 부부와 정말 소중한 인연입니다.” 새해에는 또 어떤 인연을 만날지 기다려진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7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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