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진건읍에 자리한 사릉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가 잠든 곳이다. 정순왕후는 1457년 세조 3년에 단종이 폐위되자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졌고, 왕실 여인들이 출가하여 수도하던 절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그 후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고,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여 능의 이름이 사릉이라 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정순왕후는 이곳 사릉에 잠들었을까. 사릉은 원래 해주 정 씨의 문중땅이었다. 정순왕후가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매우 안타까워했다. 경혜공주는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시누이가 되겠다. 경혜공주가 시집 간 곳이 해주 정 씨 가문이었고, 시댁에 이야기하여 해주 정 씨 집안에서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도 지냈다. 당시 묘를 조성한 것은 어마어마한 위험을 무픕쓰고 만든 것이다. 또한 당시는 왕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옆에는 해주 정 씨 가문의 묘소도 함께 있었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무덤이 능으로 다시 조성하게 되었다. 왕릉이 되면 그 주변의 무덤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지만, 숙종의 명으로 그대로 두게 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벚나무 아래를 걷는 사람들 표정은 달콤한 초콜릿이나 솜사탕을 먹을 때처럼 행복한 모습이다. 톡톡 팝콘 터지듯 벚꽃이 만개하자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들뜬다. 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핀 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은 이제 봄의 상징이 되었다. “벚꽃”의 “벚”은 순우리말인데 정확한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력한 해석이 몇 가지 있다. 옛말에서 ‘벗다, 벌어지다’와 관련 있다는 설 – 이것은 꽃이 한꺼번에 확 터지듯 피는 모습 때문에 붙었다는 해석이다. 혹은 열매인 버찌(체리)에서 나온 말 – 이것은 나무 자체를 “벚나무”라 부르고, 그 꽃이라서 “벚꽃”이라는 해석이다. 봄의 상징 벚꽃은 왜 유독 특별하게 느껴질까! 재밌는 건, 이름은 평범한데 느낌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벚꽃은 한꺼번에 피고, 짧게 피고, 바람에 꽃비를 흩날린다. 그래서 단순한 식물 이름을 넘어서 “순간, 봄, 끝, 시작” 같은 감정까지 같이 담게 된다. 즉 벚꽃은 그냥 벚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간을 느끼는 방식의 이름이 아닐까.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다”라는 인식과 함께 벚꽃 아래의 순간은 늘 새롭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가 오늘도 사람들을 불러내고 있다.
(대한뉴스 이경화 기자)= 골목은 그리 넓지 않다. 하지만 빛은 깊다. 충무로의 이 거리에는 여전히 아날로그의 숨결이 남아 있다. 노란색 외벽에 큼직하게 적힌 ‘BANDO camera & cine’. 그 아래 붉은 원형 로고로 빛나는 ‘Leica’ 간판은 이곳이 단순한 상점이 아닌 ‘사진가들의 성지’임을 말해준다. 그 아래 유리 진열장 속 카메라들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기억을 담아온 작은 역사들이다. 건물 위에 앉아 있는 조형물 하나.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형상은 이 거리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세상을 프레임에 담는 사람’이 된다. 저녁 어스름 햇살이 건물 사이로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와 따뜻한 색감은,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 한 장을 꺼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디지털 시대 속에서도 이 거리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다. 과거 영화 산업의 중심지였던 충무로였기에 영화 거리의 흔적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충무로는 카메라와 필름 그리고 사람,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기록의 거리’다. 이 풍경은 말한다. “사진은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다.”라고. 그래서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들뜬다. 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핀 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은 이제 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초의 벚꽃 축제”와 관련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봄날 벚꽃 아래에서 연회를 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정확한 사료로 입증된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에 전해진 일화에 가깝다. 우리나라 최초 벚꽃 축제는 바로 진해군항제이며, 이 축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연관이 깊다. 경남 창원시 진해 도천동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지난 1952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도천동 북원로터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추모제는 1963년부터 진해군항제로 거듭났고 이 축제를 개최하며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의 얼을 더욱 기리게 되었다. 벚꽃은 짧은 기간 동안 가장 화려하게 피었다가 빠르게 지는 특징이 있다. 짧게는 일주일 남짓 지속되는 개화 기간 역시 벚꽃 열풍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다. 시민들은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다”라는 인식 속에 축제 현장을 찾는다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간 도심 속 풍경이 의미로 바뀌는 순간 그 도시는 그냥 도시가 아니었다. 남양주시 경춘로 금곡역 인근, 유리와 철로 만들어진 현대적인 건물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구 ‘REMEMBER 1910’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뜻이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 숫자는 차가운 건축물의 질감과 대비되듯 묵직한 시간을 품고 있었다. 1910년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해다. 우리나라의 주권이 사라지고 한민족의 시간이 강제로 꺾였던 그날의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상상을 해본다. 저 건물은 유리벽 너머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기억해야 할 역사’를 강하게 말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또 검은 구조물은 그날의 무게를 상징하듯 단단히 서 있다. 사람들은 바쁘게 이곳을 지나칠지 모른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이 풍경은 묻는다. “과거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라고. 숫자 하나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그곳은 독립운동가 이석영과 그의 6형제를 기리는 역사 기념관이다. 도로 한켠, 분주한 도시의 흐름 속에 조용히 붙어 있는 금빛 표지판. ‘이석영광장’이라는 이름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난다. 단순한 길목이 아니라 ‘이석영’이라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
스쳐 지나간 도심 속 풍경이 의미로 바뀌는 순간 그 도시는 그냥 도시가 아니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유리로 반짝이는 빌딩과 정돈된 보행로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이로 발걸음을 멈춘 곳에 안내판이 있었다. 읽는 순간 그 도심은 더 이상 평범한 길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의 함성이 시작되고 번져나간 기억의 자리였다. 광장의 바닥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귓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한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 한마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두려움을 넘어선 강한 외침이었다. 삼일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달력은 벌써 3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3·1독립선언 107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 자리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친다. 휴대폰을 보며 걷고, 약속 시간을 재촉하며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과거 선조들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발걸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도시는 늘 바쁘지만 그 속에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시간이 있다.
도심 골목 사이로 오래된 옛 영화 간판들이 눈길을 끈다. 건물 벽면에 걸린 커다란 그림 간판에는 권총을 든 인물과 선글라스를 쓴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다. 한때 극장가를 장식하던 옛 영화 포스터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색은 조금 바랬지만, 그림 속에는 당시 영화의 박진감과 재미와 낭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시선을 골목 아래로 내리면 풍경은 또 다른 일상으로 이어진다. 대중적인 음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순댓국’같은 식당 간판과 오토바이, 골목의 가게들이 어우러져 생활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영화 속 장면 같은 간판 위의 세계와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골목 아래의 현실이 한 공간에서 겹쳐 보인다. 화려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가 되었지만, 이런 골목의 흔적은 한국 영화 문화의 한 시절을 조용히 기억하게 한다. 오래된 간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시대 대중문화의 기억을 품은 거리의 기록처럼 보인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건물 정면에 ‘낙원악기상가, 낙원전통시장’이라는 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1층 아래는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보이고, 그 앞에 차와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고층 건물이 있어 도심 상업지역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길을 건너는 보행자와 자전거도 보여 어느 도시의 일상적인 거리 풍경이다. 바로 이곳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낙원악기상가이다. 종로의 한복판에서 수십 년 세월을 품은 건물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거리를 빛내고 있다. 화려한 고층 건물 사이에서 다소 투박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오랜 시간 음악인과 악기 상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져 온 예술인들의 성지이다. 낙원악기상가는 1970년대부터 형성되어 기타, 피아노, 관악기, 국악기를 비롯 세계의 악기 등을 다루는 악기점이 모여 있다. 주로 악기를 구매하고 수리를 위해 많이 찾는 장소이다. 또한 많은 음악인들의 꿈과 열정도 함께 저장된 장소이다. 화려한 새 건물들 사이에서 다소 낡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모습 또한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말해준다. 한 장의 사진 속 풍경은 단순한 거리의 모습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문화와 기억의 단면을 보여준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면에 떠오르는 뿌연 거품이다. 된장찌개든 김치찌개든, 고기 육수를 낸 국물이든 예외는 없다. 많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국자로 거품을 걷어내지만, 과연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일까. 거품의 정체는 무엇인가 찌개 거품의 주성분은 단백질과 불순물이다. 특히 고기를 넣어 끓일 경우, 근육 속 수용성 단백질(알부민 등)이 열을 만나 응고하면서 미세한 기포와 함께 떠오른다. 핏물, 미세 지방, 뼛가루 같은 잔여물도 함께 섞인다. 이 때문에 전통 한식 조리에서는 “처음 끓을 때 거품을 걷어야 국물이 맑아진다”고 배워왔다. 위생 문제일까, 미관 문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거품을 걷어내지 않는다고 해서 위생상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가열된 상태라면 세균은 대부분 사멸한다. 다만 문제는 맛과 질감이다. 거품을 제거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생길 수 있다. 국물이 탁해지거나 잡내가 남을 가능성이 있다 또 표면 질감이 거칠어진다 특히 사골국이나 맑은 장국처럼 ‘청탕(淸湯)’을 지향하는 요리에서는 거품 제거가 거의 필수 과정이다. 된장찌개·김치찌개: 양념이 강하고 탁한 국물이 특징이므로 거품 제거가
(대한뉴스 이경화 기자)= ‘충무로’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영화’이다. ‘영화인의 거리’, ‘낭만의 거리’로 불리며 한국 영화를 상징한다. 또한 충무로는 을지로의 인쇄 골목과 더불어 인쇄업 중심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충무로가 얼마나 오래된 생활의 터전이었는지 좀처럼 체감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대로변 충무로역 8번 출구에서 단 한 블록만 안으로 접어들면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겉으로는 도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시장의 심장을 품고 있는 곳이 바로 인현시장이다. 인현시장의 역사는 1950년대 전후(戰後) 복구 시기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목형 시장으로 7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이 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장이 형성될 당시 충무로 일대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제조 및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식사와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한 생활형 점포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계획된 시장’이 아니라 사람의 이동과 필요가 만든 자생형 골목 시장이다. 따라서 인현시장은 오늘날 대형 상업시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즉 길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먼저였던 공간이다. 시장의 특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