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김윤옥 기자, 홍성준 기자
관음정사 박세목 원장과 발행인의 일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전통 명절은 역시 음력 설날이다. 설에는 조상께 차례를 올리고 덕담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날이기도 하다. 선물이란 순수하게 주고받는 것도 있지만, 사업 관계상 하청이나 납품 등 이런저런 관계와 또는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발행인의 일화는 설날을 맞아 박세목 원장이 명절 때면 보내는 생선에 관한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다. 두 사람은 사업적인 관계도 아니고 일 년에 2~3번 얼굴 보며 가끔 안부 전화를 묻는 사이다. 박원장은 10년이 넘도록 명절이나 어머님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부산에서 손수 손질한 생물 생선을 보내온다.
인연을 소개하기에 앞서 발행인은 구정·추석의 차례상, 어머님 기일의 제사상을 온 정성을 다해 모시며 그 다음 날은 꼭 회사로 13가지 부침개, 오색 나물, 생선과 각종 고기류 그리고 과일 5가지 이상을 푸짐하게 가져와 직원과 나눠먹으며 담소를 한다. 13살 때부터 혼자 어머니 제사를 모셨다는 발행인, 그 이유를 알아본다.
발행인의 어머니 사랑, 13살 때부터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발행인은 20대 중반 유모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간 서울에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며 발행인의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물려주었던 로렉스 시계와 마도로스 파이프, 라이터 등 유품 몇 점을 전해 줬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유년시절을 알고 있던 발행인은 유모가 있었는지조차도 잘 몰랐다.
어머님이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아버님마저 돌아가신 후 외갓집 친척들이 서울 가서 공부를 잘 가르치겠다며 부모님의 재산을 정리한 후 데려간 것이 유모와는 이별하게 됐다는 것이다.(이 사연은 추후 인연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던 발행인. 10대 때 잠시 머물던 아버지 친구 집에서 발행인은 어느 날 그 집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조상님의 제삿날이야. 조상께서 오시니 몸가짐을 바로한 뒤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거야’이 말을 들은 발행인은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어머님 기일을 알고 있기에 바로 13살 되던 그해 혼자 제사를 모신다.
- 어떻게 13살에 어머님 제사 모실 생각을 했는지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날은 엄마가 오실 것이다 생각하고 엄마 만나려 제사 지낸 것이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엄마도 오시고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기에 제사 모실 때면 생전 눈앞에 살아계신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는 2월이라 날씨가 몹시 추웠어요.
그때는 너무나 가난해서 제사가 다가오면 무엇이든 먹을 것은 아껴 며칠 전부터 모았습니다. 개울 밑에 상을 차려 엄마 제사상에 놓으려고 먹지 않은 제 저녁밥과 그간 모은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며 다짐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 따뜻한 방에서 계절별로 나오는 음식을 다 차려드리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불효를 많이 하고 있죠.
아버지는 이북 연안 분이시고 어머니는 경남 함안 분이십니다. 부모님을 선산에 같이 모셔야 하는데 아버지 무덤을 아직 찾지 못해 외갓집 선산 외할아버지 옆에 어머님 묘소가 있으니 불효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있다면 병석에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분이고 설사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선산에다 모실 수 있는 나의 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 왜 생일상을 50이 넘어서야 받으셨는지요
어느 날 뉴욕에 사는 외사촌 누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누님도 어느덧 80세가 넘었는데 친정 산소를 후손이 잊지 말라는 마음으로 정리하면서 자그마한 비석을 세웠답니다. 저는 그동안 아침에 생일 밥을 먹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셔서 혹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사실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마음에 제가 태어난 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죄책감으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80이 지나셨기에 생일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풍습에 80세가 넘으면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이 바로 부모님 아니겠어요. 부모님 없이 어떻게 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어머님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집안 어른에게 들으니 어머니는 살아생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다가 젊은 나이 32세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다른 사람이 60년을 살다 간 것만큼 몫을 다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향에 가서 어머니 함자만 대면 친구 분이나 동네 분들이 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우십니다.
그런 덕인지 어머니 제삿날이면 벌초를 해주는 형님도 있고 박 원장 덕에 싱싱한 생선을 올리고 떡, 과일 등 대부분 주변 지인들이 가장 좋은 물건을 보내줍니다. 어머니 당신의 기운으로 자식을 통해 받는 것인지 자식의 인연으로 당신이 잡숫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닦아 놓은 덕으로 받는 큰 선물 같습니다.
주신 분들께는 답례할 것이 없어 주신 분들의 마음이 헛되지 않게 어머니 대신 기도를 합니다.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늘 가슴에 계시어 제가 다른 길로 탈선하려면 저를 많이 잡아주십니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다음 생에 가면 꼭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으로…. 제 나이 일곱 살 때였을 겁니다. 어머니가 친구 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어머니만 오려서 손가락 한마디만 한 사진 크기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배고플 때도 기쁠 때도 자주 보다 보니 사진이 바랬어요.
누가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초상화를 그려준다기에 사진을 줬는데 그분이 사진을 잃어버렸습니다. 희미했던 어머니 사진마저 잃어버리는 불효를 저질렀어요. 꿈에서라도 어머니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죠. 추석이면 첫물에 수확한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해서 차례상을 차려 부모님께 인사 올리면 참 기분이 좋아요. 제사상도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뭘 와서 잡숫겠습니까. 음식은 산 사람이 먹지만 조상은 가족이 모여서 담소를 즐기는 그런 모습과 정성을 잡숫지요. 그래서 저는 때마다 손수 생선을 장만해서 보내주시는 박세목 원장님이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진은 없지만 항상 제사 때면 옆에 계심을 느낄 수 있고 부모님이 미소 지으며 잡숫는 모습을 상상하며 위안을 삼습니다.
박 원장과의 만남
-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요
발행인이 먼저 말했다.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당선인의 동생인 박근령 이사장의 소개로 알게 되어 부산에서 몇 차례 오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한뉴스를 찾아와 지혜와 가르침을 달라며 스승이 돼 달라고 하시기에 과찬의 말씀이라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지혜와 정신을 가지고 계시는데 친구로 지내자고 한 것이 만남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박 원장이 덧붙인다.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부산경남지부장을 10년 넘게 맡았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지요.”
- 박 원장님은 왜 생선을 보내게 된 것인지요
“십 몇년 전의 일이죠. 김 회장님(발행인)을 알게 된 후 잠을 잔 것은 아닌데 어떤 쪽진 할머니인지 아주머니인지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사상에 생선이 안 오르네’하시는데 김 회장 얼굴이 딱 떠오르는 거예요. 바로 전화를 드렸죠. 당시 김 회장님과 사모님에 대해 얼굴만 뵈었지 가족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제사를 모신다기에 앞으로 생선은 제가 올린다고 했죠.
쭉 보내던 어느해 회장님이 생선을 올리지 말라고 해서 안 올린 적이 있는데 또 그 머리 쪽진 분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회장님께 왜 올리지 말라고 했는지 혹시나 제가 보내는 물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물었더니 미안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제가 올린다고 했습니다.”
- 왜 사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올리지 말라고 한 것인지
어른 팔뚝만한 싱싱한 생선인 도미, 조기 등 생물 생선을 손수 손질해서 보내주십니다.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고마우면서도 귀한 일이라 여기며 한 번 정도 선물할 거라 여겼는데 어느덧 십 년이 훌쩍 넘은 거지요. 박 원장님이 바쁜 분인줄 잘 알고 제가 해드리는 것도 없는데 매번 받는 것이 참 미안했죠.
박 원장 주변 분에게 들어보니 워낙 일이 많다보니 집안에 양말조차도 당신 손으로 못 챙기는데 저에게 보내는 생선은 손수 사서 정성껏 다듬고 꾸덕꾸덕 말리는 것까지 직접 하신답니다. 제사 모실 때 우리 집에서는 찜통에 찌기만 하면 되지요. 부탁이나 아쉬운 것이 없는 분인데 또다시 생선을 보내는 것에는 어떤 기운이 있는 것 같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아집, 고집이 대단한 두 사람
- 박세목 원장은 어떤 사람인지 발행인에게 물었다
원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성철 큰 스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행하라’는 뜻의 ‘관음행’ 이름을 얻습니다. 부산 금정사 줄기 범어사 밑에 관음정사를 갖고 있으며 아들은 세브란스 병원의 의사이고 딸은 엄마에게 잘하는 효녀로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죠. 평범하면서도 때로는 불의를 보고는 못 참고 입바른 소리를 할 때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초대 여성 대통령이 꼭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 소리가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시간이 나면 외국을 다니면서 인체에 관해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 관음정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조언을 들으러 오기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정·재계 및 기업, 문화인 등 제가 아는 인연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박 원장이 보는 발행인은
저는 누구한테 아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눈빛을 보고 얼굴 색깔을 보는데 발행인한테는 감당할 수 없는 지혜가 이야기 속에 묻어나오는 거예요. 남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정신적인 세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누가 감히 엿볼 수 있고 탐하고 훔쳐갈 수 있을까요.
정신세계와 아집과 고집이 대단한데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높은 관료, 재벌들 두루 다 만나봤지만 그들은 출세와 자기 욕심을 위해 감언이설도 필요하죠. 발행인은 그런 것이 없었어요. 제가 회장님의 손을 탁 잡고 ‘대단하십니다. 사장님! 오늘부터 정신 지주자 좀 돼 주세요.’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친구 되자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극찬이 나오는 거예요. 어디 가서 누구 안다는 소리를 잘 안 합니다. 그런데 김원모 회장님 하면 ‘대단’자가 붙는 거예요. 지혜가 많은 분이라 사람을 잘 교육할 것이고 아집과 고집으로 설 자리에 꼭 서실 분이며 누구를 망신시키거나 실수하지 않을 분입니다. 마음 속에서 김원모 회장님을 존경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진짜 그대로입니다. 변화라든지 기교라든지 사람을 홀리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도 백호년에 태어나서인지 다른 사람보다 아집과 고집이 대단한데 그런 점이 회장님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통하고 회장님에게서 어떠한 군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성품과 구도의 정신을 발견한 것이죠. 회장님의 사고방식이 어긋나고 어두운 기운이 돈다면 저도 안 합니다. 보면 볼수록 회장님은 타인의 귀감이 됩니다. 매년 생선을 보내드리는 이유입니다.
인연의 부탁을 소중히 여기며
기자가 그동안 봐온 발행인은 남한테 부탁을 잘 안 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지방에서 부부가 발행인을 찾아왔다. 고마운 일이 있어 감사의 표시로 봉투를 꺼내놓는데 발행인은 돈보다 소중한 정을 달라고 했다. 기자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졌다. 그 부부는 공직에서 퇴직하고 발행인에게 새로운 직장 관계로 부탁을 했었는데 들어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발행인은 어디론가 몇 번씩 찾아가며 무척 신경을 썼다. 하루는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허공에 대고 인사하며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일이 잘 성사되어 부부가 찾아 왔고 발행인은 내 돈 든 것 없다며 돈 대신 정을 달라고 했다. 돈은 쓰면 없어지지만 사람의 정은 노을이 다 할 때까지 유효하지 않겠느냐며.
기자는 발행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는 사이죠?”그때 박세목 원장의 집안 동생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중히 여기는 박 원장의 동생이기에 발행인은 그 부부를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발행인은 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툭하면 아는 사람이고 형, 동생 하다가도 조금만 잘못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원수처럼 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연은 소개했다고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개받는 사람도 소개한 사람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원장님의 정성을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소개받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분께 드리는 답례가 아닐까 합니다.”
기자뒷말
‘씨도둑은 못 한다’는 말이 있다. 발행인은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고도 길가다 물건이 안 팔려 추리한 모습으로 있는 연세 드신 노점상을 보면 꼭 팔아주려 애를 쓴다. 2012년 봄 지방 출장 때 길이 막힐지 몰라 기자단이 서울에서 일찍 출발하니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다. “이보시게 본부장, 이 근처가 내 고향이야. 뉴욕의 사촌 누이가 예전 나라에서 내린 할아버지 비석이 훼손되었다는데 가보았느냐고 몇 번 전화 왔었어.
난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한번 찾아볼까?”성함만 알기에 마을회관이나 면사무소, 가게에 물었으나 못 찾아 결국 발행인이 몇 차례 통화 끝에 경북 영산 마을 어귀란 것을 알았다. 사방이 넓은 철책으로 둘러쳐진 그 안에 김성덕 함자가 보일 때의 그 감흥을 어이 잊을까. 主事金性德施惠不忘碑(주사 김성덕이 은혜 베푼 것을 기리는 비). 요약하면‘청렴하게 세금을 내고 곳간을 열어 가난한 사람을 도왔네. 사실대로 써서 새기노라‘이다. 발행인은 항상 지인들에게 충, 효 사상을 실천하라고 한다. 이 말과‘사람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글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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