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재난은 어느 개인 어느 집단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고의적으로 남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뒷산에 불이 나게 하는 악한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다 밝힐 수 없지만,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여객기 납치범에 의한 ‘자살 공격’으로 잿더미가 된 참사나 3년 전에 한국 서해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비극의 원인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꽃다운 학생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세월호>가 어찌하여 충무공 이순신이 ‘울돌목 해전’으로 나라를 살리신 그 진도 앞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는지 아직은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언론 매체가 전적으로 <세월호>의 참사만을 앞을 다투어 연일 보도하니 이것이 방송사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까 아니면 정부의 지시에 따르는 것입니까? 대한민국에는 그 여객선의 침몰 밖에 다른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참상을 국민에게 알려주는 언론의 태도나 자세는 더욱 역겹게 느껴집니다. 그 배의 선장이나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선체에 갇힌 한 사람이라도 빨리 구조되기를 갈망하는 마음도 한결 같습니다. 승객의 수나 실종자의 수 또는 구출된 사람들에 관한 발표가 오락가락하니 이런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언론은 호통을 치니, 이 사태의 복잡다단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슬픔에 잠긴 가족과 학부모와 국내외 동포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는커녕 오히려 찌르고 쑤시고 그 아픔을 더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 재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론은 대한민국과 국민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말을 해야지, 마치 <뉴욕타임즈>도 ‘한국은 위기 대처능력이 전혀 없는 나라다’라고 했으니 대한민국은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침몰할 것이라는 어조로 입장을 굳혀서는 안 됩니다. 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선장은 그 배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제대로 생긴 나라의 선장은 선박이 조난을 당했을 때 승객을 그대로 두고 먼저 배를 떠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선장은 선장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자격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만사제치고 진도 앞바다의 조난현장으로 달려갈 만큼 이번에 일어난 여객선 참사는 가히 국가적 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언론이 일제히 이 조난 사고를 대서특필하는 것을 보면 이 비극은 어쩌면 전 세계를 눈물짓게 하는 희랍의 비극을 닮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생존의 영원한 수수께끼’에 대한 어떤 답을 요구합니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따지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우리들의 질문은 ‘어떻게’(how)보다는 ‘왜’(why)라는 질문에 쏠립니다. ‘How’를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것은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필요한 일이겠지만 상처 받은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조금도 위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Why’는 우리들을 조금은 더 사람답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장은 왜 배에서 죽어야 하는가?’ 그는 그 배의 왕인데, 일이 잘못되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합니다. 조난당한 승객들을 그대로 두고 선장이 먼저 구조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이 나라의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집만 번듯하게 지어 놓았을 뿐, 기초 공사는 전혀 되어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가 조난을 당하면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선장과 선원들은 최선을 다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선장은 배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선장의 본분입니다. ‘오호 통재, 오호 통재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온 국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도 하도 슬퍼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정쟁을 일삼던 여당과 야당의 정치꾼들의 마음도 이 큰 슬픔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다는 이른바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미워한 사실이 부끄럽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순수한 양만을 골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엔가 한강의 성수대교 상판이 떨어져 등굣길의 꽃다운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대교가 무너지는 큰 비극은 없을 겁니다. 이 어린 양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적어도 이 나라에서 앞으로는 여객선의 침몰은 없을 겁니다. 희생양들의 희생이 헛된 희생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5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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