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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도서

음악기행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음 하나하나에 존재가치를 부여한 음악의 아버지

[인터넷 대한뉴스] 글 조선영 기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잘난 것 없는 자식이라도 부모에게는 모두 소중한 당신의 자식이다. 이렇듯 음악을 구성하는 12음이 바흐에게는 하찮은 것 하나 없는 귀한 자식들이었다. 한 음, 한 음 모여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형제 음들을 찾아 화성을 만들었고, 모든 음이 주인공이 되어 음악을 이끌 수 있는 조성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이렇게 바흐 이후에 모든 음들이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무조건 외우기만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된 것이다.

 

 

바흐의 어린 시절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바흐 집안은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가문이기에 바흐 역시 아버지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9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엔 아버지를 잃었던 바흐는 불우한 유년기를 자신의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집에서 보냈다. 큰형과 함께 살며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고, 형의 오르간악보를 몰래 필사해 독학으로 연주하다가 들켰지만,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형에게 정식으로 오르간을 배웠다.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오르가니스트로 시작된 교회음악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했고, 아른슈타트(Arnstadt)의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당시 북부독일 쪽으로 여행을 하며 대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북스테후데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그 영향은 이 시기에 작곡된 그의 오르간 곡에 남아있다. 북스테후데와 사제의 인연으로 실력이 날로 향상되어 22세가 된 1707년에는 뮬하우젠의 성블라지우스 교회에서 일했다. 뮬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며 작곡에도 몰두했으나, 교회 루터파 내부분쟁에 말려든 바흐는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가 간 곳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지냈던 이곳에 1708년 23세로 젊은 대가가 되어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이 바이마르 궁정에서 지낸 10여 년은 그의 오르간 음악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존하는 오르간 곡 거의가 여기서 작곡되었고, 실력도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세속적 음악의 전성기 쾨텐시절

 

그리고 1717년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였고, 쾨텐의 궁정은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합주곡이나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바흐는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의 협주곡에 큰 감명을 받아 많은 협주곡 작곡에 몰두하는데, 그가 남긴 협주곡중의 최고라는 평을 듣는 브란덴부르크 공에게 헌정한‘브란덴부르크 협주곡’등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이 때의 곡들은 안정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이 시대가 없었다면 바흐에게 교회음악 이외의 곡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별한 아내 바르바라와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 안나

 

바흐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는 현모양처에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바흐는 아내에게 집안의 거의 모든 일을 맡겼고, 7명의 자녀를 둘 정도로 행복했다. 하지만 1720년 자신이 연주일정을 마치고 올 때쯤 갑자기 아내의 부고를 듣고 황급히 집에 와보니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다고 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바흐는 다시 교회음악에 심취하게 되고, 화려한 쾨텐 시대는 첫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다음 해인 1721년, 그는 16세 연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당시 전염병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을 때라 바흐도 총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10명은 어렸을 때에 사망했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음악교육도 바흐 부부는 게을리하지 않았고, 부인 안나는 가족음악회를 항상 열었다. 그래서 4명의 자녀는 아버지 뒤를 이은 음악가가 되었다. 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안나는 남편 바흐의 칸타타를 노래하기도 했고, 항상 즉흥곡을 연주해 악보로 남기지 않고, 자신의 악보를 소중히 하지 않는 성격인 바흐를 위해 그의 악보를 필사해 모아두었다. 이렇게 바흐와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필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다시 시작한 교회음악

 

첫 번째 부인과의 사별, 잇따른 아이들의 사망으로 바흐는 매우 상심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다시 교회음악을 하기 위해 이사를 했다. 1723년 라이프치히로 옮긴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그는 이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도시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에 바흐는‘요한수난곡’,‘마태수난곡’등 200여 곡에 달하는 종교음악곡과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그리고 1736년경부터는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1747년 5월, 바흐는 아들 필립 엠마누엘이 프리드리히 2세를 섬기며 쳄발로주자로 일하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여 왕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음악의 헌정’이며 대왕에게 헌정한 곡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푸가의 기법’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지나치게 작곡에 몰입한 나머지 실명해‘푸가의 기법’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해 1750년 7월, 바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바흐의 죽음 이후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한 그의 음악

 

지금은 아무리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대음악가이지만, 그도 죽은 후에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고,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 또 바흐의 아내 안나가 남편이 죽은 뒤 10년 후‘구호대상부인’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보아도 쉽게 잊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빨리 잊혀진 이유는 거의 교회에서만 활동을 해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음악을 듣기가 쉽지 않았고, 악보의 유실로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제자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낭만파 시대에 멘델스존이‘마태수난곡’을 복원하며 바흐의 음악을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렸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멘델스존의 하인이 푸줏간에서 산 고기의 포장 종이가 낡은 바흐의 악보‘마태수난곡’중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의 스승 첼터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일부 악보를 합쳐 다시‘마태수난곡’이 100년 만에 부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찾아낸 바흐의 악보도 있다. 소년시절 파블로는 아버지와 첼로를 사러가서 바구니 속의 낡은 악보들 사이에서 바흐의 첼로악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무반주 첼로모음곡’으로 12년 후 유명한 첼리스트가 된 그의 대표적인 연주곡이 되었다. 바흐는 독일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이들의 발견과 노력으로 지금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클래식이라는 부담감 없이 듣는 바흐의 작품들

- 관현악모음곡 제 3번 라장조 BWV1068 중‘Air’

 

긴 제목보다 직접 들어보면 모두가 알 만한 음악일 것이다. 우리에게‘G선상의 아리아’로 알려진 곡이다. 바이올린의 G선만으로 연주를 하는 이 곡은 바흐가 가장 행복했던 바이마르 쾨텐시절에 작곡한 곡으로 편안함을 주는 곡이다.

 

- 골든베르크 변주곡

 

이 곡은 바흐의 제자가 불면증에 걸린 러시아의 백작을 위해 거의 밤새도록 연주한다는 말을 듣고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한 음악으로 작곡했다. 클라비어을 위한 곡으로 한 개의 주제가 30개의 변주곡과 마지막에 반복되는 주제로 이루어진 총 32개의 변주곡이다. 이 곡을 들은 백작이 바흐에게 1년 수입에 달하는 금화를 선물했다고 하니 그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불면증 치료곡으로 유명한 곡이라 음악회에서 연주하기를 꺼렸던 이 곡은 구부정한 자세와 자신의 피아노 의자를 가지고 다니며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연주해 다시 빛을 본 곡이다.

 

-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품집

 

아이들과 바흐를 위해 항상 헌신하던 아내 안나가 아프자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소품집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미뉴에트 G장조가 들어있다. 바흐는 아내를 위한 작품집 두 권을 남겼는데, 행복한 가정생활을 느끼게 해주는 45개의 소곡들이다.

 

 

기자 뒷말

 

유럽의 성당이나 교회에는 거의 다 파이프오르간을 갖추고 있다. 그것도 100년이 훌쩍 넘는 것들로 영화나 사진으로 보던 흰 곱슬머리의 바흐가 연주했을 법한 거대한 크기의 것들도 많다. 파이프오르간을 사람들은‘악기의 왕’이라고 말한다. 파이프오르간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낼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바흐의 음악은 소리의 강약으로 느끼기보다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악기들이 강약을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원래 악보에는 셈여림의 표기가 없다. 그래서 단순할 수 있는 음악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멜로디가 서로 대화를 하듯 시차를 두고 나오고, 그 안에서 화음의 조화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흐는 음들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고, 화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이런 작곡법을 바흐가 완성해 놓았기에 모차르트가 바흐의 아들에게 그의 음악을 배우고, 베토벤이 궁정 오르가니스트에게 그의 음악을 배웠다. 바흐의 음악이 이 유명한 작곡가들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어두운 불 꺼진 성당 안에 사람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켜놓은 촛불만 성당 안을 밝히고, 이 때 파이프오르간의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연주될 때의 그 감동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서 그 깊이가 느껴진다. 기자가 생각할 때 교회음악은 바흐의 곁에서 떠나지 않은 목표이고 삶의 안식을 준, 생활 그 자체였다.

그의 음악이 사장되었을 때 신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래서 하나하나 다시 알려지도록 앞서 언급한 멘델스존이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에게 계시를 한 것이 아닐지. 산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아주 작은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바흐의 음악 속에서 작은 행복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9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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