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50년 전 아버지 대통령은 나라의 가난에 목메여 울었고
딸 대통령은 ‘통일의 대박’을 준비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2014.3.23~25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이어 3.25~28 독일을 국빈 방문했다. 53개국과 4개 국제기구 대표가 참석한 2014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 및 독일 순방 관련 내용은 각 언론 매체의 신속 정확한 실시간 보도를 통해 전 세계로 알려져 잘 알 것이다.
본지는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의 의미를 더듬어봤다.
1964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라인강의 기적을 모델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4년 딸 박근혜 대통령은 20세기에 평화적으로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달성한 유일한 국가인 통독의 역사를 교훈 삼아 비무장지대(DMZ) 내 세계평화공원조성과 핵안보 및 한반도 평화통일을 구상하고 있다.
<편집국 / 사진 연합뉴스 제공>
독일 국빈 방문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독일과 연관 지어 잊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독일 유학생 백영훈(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박사를 통해 약속도 없이 독일(당시 서독)을 노크하게 되었다. 당시 백 박사는 정부로부터 특명을 받고 절절한 애국심으로 서독을 6번 왔다 갔다 했다. 대통령이 국빈 초대를 받고서도 비행기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던 일,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이역만리 그곳까지 왜 가게 되었는지, 돈은 어떻게 빌려 올 수 있었는지, 동병상련 민족 분단의 아픔 등. 그의 저서 「조국 근대화의 언덕에서」에 잘 나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세계 각국 정상들의 환영을 받으며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서 당당하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은 정말 자랑스럽다.
불가능은 없다, 오늘날 한국의 뼈대 만든 박정희 대통령
라인강 기적 이룬 독일로 눈을 돌리다
1960년대 국민 1인당 소득은 세계 125개 국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인도가 62달러, 우리나라는 80달러, 북한은 87달러로 우리보다 오히려 잘살았다.
※반세기 후 경제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GDP는 2만 3838달러로 298배로 늘었다.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개발이었지만, 자본도 자원도 없이 무엇으로 경제를 일으킬 것인가. 미국의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미국은 원조를 끊었다. 왜냐하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 동남아시아 국가 지역에서 군사 쿠데타가 빈발했는데 만약 한국을 도와주면 쿠데타 성공을 뜻해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로 눈을 돌렸다.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이 영어는 할 줄 알아도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없어 정부는 긴급히 수소문하여 독일에서 공부한 백영훈 박사를 찾아 특명을 내렸다. 그는 당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 장관이 자기 은사와 동료 교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새벽 6시에 은사를 찾아가 “국가가 나를 보냈습니다. 돈 꾸러 왔습니다. 장관 좀 만나게 해주세요.”라며 눈물로 호소한 끝에 독일 정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에는 비밀을 지키라며 미국의 눈을 피해서 3천만 달러 상업차관을 줄 테니 은행에서 지급보증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파독 광부, 간호사 모집에 학력 속이고 대졸자 몰려 ‘신사 광부’
월급을 담보로 한 차관 근대화 불씨
가난한 나라에 지급보증서를 써줄 외국 은행이 있을 리 만무했다.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백영훈 박사와 함께 공부했던 서독 친구가 찾아와 노동법을 펼쳐 보이며 석탄 광부 5천 명, 간호사 2천 명이 필요한데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탄광은 지하 1천 m까지 내려가 지열 40도를 견뎌야 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을 못 이긴 독일 근로자들이 도망갔던 것이다.
당시 광부 지원자가 4만 8천 명, 고졸 모집에 학력을 속이고 대졸자가 몰려 ‘신사 광부’라고 했을 정도다. 간호사는 전국에서 2만 8천 명이 접수했다. 1963년 12월 20일, 김포비행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돌아올 비행기도 없이 남자 100명 여자 50명 1진이 독일로 떠났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근면 성실한 태도가 현지에서 신뢰를 얻어 1억 5천만 마르크(약 4천만 달러) 차관의 계기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내 약 34,000명의 동포들이 독일사회에 모범적으로 정착해 왔으며 최근 우수한 한국 유학생들이 독일 경제 및 사회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우리 동포에 대한 독일측의 관심을 당부했다.
국빈 초대받고도 비행기가 없어 영업용 제트 여객기를 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말로만 듣던 라인강의 기적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실체를 자신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건국 이래 최초로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한 나라의 국빈 자격으로 초대받고도 타고 갈 비행기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프로펠러 비행기 몇 대가 전부였다. 백영훈 박사는 최두선 총리와 함께 독일 대통령을 만나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비행기를 빌려 달라는 말을 꺼내야 하는데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최두선 총리는 발로 백영훈 박사를 툭툭 건드리며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개인이 아닌 나라를 위해서 체면도 버렸다. “타고 올 비행기가 없습니다. 비행기 좀 빌려주세요.”
1964년 12월 6일 겨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육중한 제트 여객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 민간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649편 제트 여객기로 본(옛 서독의 임시수도)~도쿄(일본) 상용노선이 홍콩으로 가다가 잠시 노선을 변경시켜 한국에 들렀고 대통령은 일반 승객과 함께 타고 독일에 갔다. 무려 7개 도시를 경유해 서독 쾰른 공항까지 가는 데 28시간이 걸렸다. 대통령 수행원 수는 24명.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 공군 1호기를 타고 수행원 150여 명과 11시간 걸려 독일로 갔다.
독일이 본 한국의 첫 인상은
근면, 검소, 프로이센(규율적인 사람을 뜻하며 독일인의 상징)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6일~14일 독일을 방문했다. 서독의 본, 서베를린, 뮌헨을 순회했다. 퀼른 본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라인강 기적의 싱크탱크인 에르하르트 수상(오늘날 총리) 등의 공식 영접을 받았다. 이때 백영훈 박사는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대통령의 경제 고문 겸 통역관의 자격으로 수행했다.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빈 공항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독일인이 태극기를 흔들고, 베를린에 갔을 때는 비행기에서 내리자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따뜻한 환대에 대통령 내외는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꺼낸 첫 마디 “여러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애국가도 끝까지 부르지 못한 채 서로 누구랄 것도 없이 눈물과 한숨으로 울음바다를 이뤘다. 장소를 옮겨 아우토반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옆자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뤼브케 대통령이 말했다.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고 칠순의 노대통령이 40대 말의 젊은 대통령의 손을 꽉 잡고 위로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당시 독일은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들의 근면, 검소, 정직을 통해 한국의 첫인상을 느꼈다. 이들 덕분에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추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방문지는 무명용사 묘지, 베를린 장벽, 함보른 탄광, 독일 주요 기업 및 제철소, 아우토반을 방문했다. 아우토반에서 단군 이래 대토목 산업인 고속도로 건설의 설계가 시작됐다. 대통령은 반드시 오늘을 잊지 말자고 한 번 더 다짐했다. 자동차, 제철, 정유 등 중공업 중심 경제 비전을 고심하고 공산국가에 대한 공동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서독 수상은 대일 수교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통일 관련 인사 접견, 독일 경제인 간담회, 독일 기업 방문, 드레스덴 통일 독트린 발표와 연구기관 방문, 동포 간담회 등 주요 행사를 가졌다. 방문 초점은 창조경제 영역 중 중견기업 육성과 관련한 경제 비전 고민, 독일의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에 대한 시사점 제시, 독일의 끊임없는 과거사 반성과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 비교.
지난간 50년에 다가올 50년을 더한 우리의 미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지 50년,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가 발전모델로 삼아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나라에서 배워갔다. 제품도 그렇다. 예전에는 겉보기에 화려해서 물건을 사려고 하다가도 한국산이라고 하면 슬며시 놓고, 겉보기에 별로인데도 외국산이라며 좋다고 사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바뀌었다. 뉴욕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 한복판에 우리 기업이 만든 TV 등 전자제품이 떡하니 서 있고 ‘Made in Korea’가 명품 브랜드가 됐다. 그 외 스포츠,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을 알리고 세계인들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한국어과도 증가추세다.
그것은 훌륭한 지도자의 지도력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도덕과 성실, 정직이 만들어 낸 오늘이다. 미래 50년 아니 100년 후 후손들이 정말 축복받은 나라의 국민이 되려면 한 번 더 애국심을 가져야 할 때다. 지나온 세월을 교훈 삼아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에게는 박수 치고 칭찬을 아끼지 말자. 조금 부족한 사람에게는 한 번 더 격려와 이해하고 서로 마음을 모아 노력하면 대한민국은 또 기적을 낳는 국가가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안보정상회의 참석 및 독일 방문의 노고가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4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교보문고, 영풍문고, MBC(내), 반디앤 루니스, 테크노 마트 프라임 문고를 비롯
전국 지사 및 지국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보기 쉬운 뉴스 인터넷대한뉴스(www.idhn.co.kr) -
- 저작권자 인터넷대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