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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일반

20세기의 인물 - 춘원 이광수

집단 심리적 오해와 왜곡에서 벗어나 역사적·인간적 진실을 바로보자.

요즘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할지 검인정으로 할지의 논란이 많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국사에 관심을 갖고, 서로 다른 시각을 잘 조율하여 후대에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려 하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근대사의 인물을 중점으로 그와 직접 접한 사람이나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통해 여러 자료들을 발굴하여 기사화하고자 한다. 한국문학의 대표적 인물인 춘원 이광수는 일제말기 민족사의 비극인 친일행적이 문제되어 모든 그의 문학적 업적마저도 사장되어 잊혀가고 있다. 그에 대해 뜻이 있는 지식인들이 춘원연구학회를 설립하고 포럼 및 연구를 통해 춘원에 대해 바로 알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6월호에 춘원 이광수를 게재하며 그에 대한 행적을 더 발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이며 춘원연구학회 회원으로 이광수의 소설‘유정’의 배경이 된 소련의 바이칼호 일대를 다녀온 최종고 교수를 만났다.

글 김윤옥

   
 

▲ 최종고 교수와 대담을 나누는 본지 김윤옥 기자

 

최종고 교수

   
 

1947년 경북 상주출생으로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3년간 서울대 법대에서 법사상사학을 연구·강의하였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30여 권의 법학서 외에‘괴테와 다산 통하다’등 일반교양서도 30여 권을 저술했다. Law and Justice in Korea와 East Asian Jurisprudence로 2012년 삼일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에는 춘원자서전‘나의일생’을 출간했다.

- 최 교수님은 법학자로 정년퇴임한 이후에는 춘원 이광수 연구에 집중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네, 저는 독일에서 공부한 이래 법률가이자 문학가인 괴테를 제 멘토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작년 교수직을 은퇴하고 역시 한국인으로, 한국인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한 사람 연구해보아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솟았습니다. 아마 제 전공이 법사상사이기 때문에 제도보다도 인간이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그간 15년간 한국인물전기학회(Korean Biographical Society)를 운영해오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에도 전기 자서전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나오는 것으로 능사가 아니라 좋은 전기 자서전이 나와야 합니다. 저도 몇 전기를 썼습니다만, 춘원의 전기를 쓰려고 하니 첫 번으로 눈에 들어오는 사실이 그분이 문인이시기 때문에 많은 작품 가운데 자신에 대해 쓴 글도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기를 쓴다면 당신의 글을 많이 인용하면서 써야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예 그분의 자서전적인 글만 모아서 편집을 하면 자서전이 저절로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정말 작업을 해보니 소년시절부터 만년까지 거의 카버되고 마지막 납북되실 때의 모습은 둘째따님 이정화 박사가 이화여고 학생으로 쓴‘아버님 춘원’(1955)이 있어 마지막 장을 채워 한 권을 만들어보니 무려 670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자서전이 되었습니다. 언급되는 인물만도 250명이 넘어 이들에 대해 각주로 설명을 하고 자세한 연표를 만들어 붙이고 하니 1년 반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외국 같으면 진작 이런 책이 나왔을 텐데 우리는 그동안 춘원 외면 내지 망각의 60년이란 세월이 이런 결과를 나타낸 것입니다.

- 작업을 해보니 어떤 생각이 들고 춘원은 어떤 분이란 생각이 듭니까?

춘원의 인간상을 몇 마디로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만, 한 마디로 대단한 천재적 능력을 타고난 인물인데 일제, 분단, 납북이라는 민족의 수난을 한 몸에 안고간 희생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풍문과 선입견으로 친일파라는 한 마디로 매도하고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동안의 풍토는 이제 서서히 극복되고 정상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천재적 인물에게 민족주의의 잣대로만으로 평가하기에는‘세계성’을 넓게 가진 한국인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이제부터 이런 다면적인 면모를 추구하여 춘원연구 내지 춘원학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메모 중 춘원의 소설‘이순신’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대목

▲ 사릉 춘원고택의 황량한 모습

- 춘원 작‘유정’의 주인공 최 석 교장선생을 보면 본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항변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안고 떠납니다. 해방 후 춘원의 심정이 그와 같지 않았을까요?

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왜 춘원이 친일의 참회나 사죄요구를 하지 않았나 아쉬워하고 비난했습니다. 춘원은 거짓말을 제일 싫어했기 때문에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는 신념을 꺾고 잘못했다고 참회와 용서를 빈다는 것이 내심 허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그의 자서전을 작업하면서 특히 해방 후에 쓴 그의 시, 저는 이것을 사회시 내지 정치시라 부릅니다. 이것들을 읽어보면 그는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아 이승만과 김구 양쪽에 우호적이면서도, 혼란하게 날뛰는 정파와 혼란상에 냉정하게 거리감을 갖고 명철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춘원이 친일참회를 위해 혼자서 3년간이나 돌베개를 베고 입이 돌아가는 증세까지 보였던 것은 알려진 얘기죠.

- 최 교수님은 이번에도 러시아를 다녀왔는데, 혹시 한인이 살고 있는지... 그 지역이 그런 문학적인 배경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가요 ?

저는 작년과 금년 세 차례 러시아의 시베리아지방에 춘원의 발자취를 찾는 답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작년 8월에는 바이칼호수에 가서『유정』의 배경무대를 생각했고, 9월에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유적지에 가서 춘원의 기록을 확인했고, 이번 8월에는 치타(Chita)에 가서 춘원이 7개월간 살며 이강(李剛) 선생과 함께『대한인 정교보』신문을 발행하던 현장을 찾았습니다. 치타에서 반 시간 정도 나간 체르노스키구의 아스트라한스카야라는 거리입니다. 이것도 춘원의 기록을 근거로 찾은 겁니다. 치타에는 현재 3백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데, 권영하 회장이 자바이칼대학교 교수로 활동이 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춘원과 이강 선생을 포함한 100년 전의 한인사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전쟁과 혁명의 상처가 깊었고 강제이주를 당해 그들의 삶이 각박했다는 얘기겠지요. 마음이 스산했습니다. 그래도 권 회장과 자바이칼주 주의회 의장, 자바이칼대학교 총장 등과 환담하며 이런 사실을 얘기하니 지금부터라도 역사복원에 주력하겠다고 열의를 보였습니다. 서로 잘 협력하면 기념비도 세우고 학술문화교류도 하면서 상호 유익한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한국도 할 만한 능력과 여유가 있으니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종고 교수가 직접 스케치한 춘원과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

▲ 치타의 춘원이 살던 거리를 발견하고 치타 권영하 한인회장과 함께

- 외국의 경우를 보면 작가가 들려 커피 마시며 식사한 곳도 유명한 명소로 각광을 받는데요. 우리나라에도 춘원을 기리는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작에 있어야 했지요. 우리나라에 문학관이 80여 개나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춘원문학관이 없는 것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왜 한국엔 최대문호의 문학관이 없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설명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마치 한국문학의 출발점이자 관문을 들어온 다음 그 관문을 두드려 부숴 버리고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래 사시던 효자동 자택은 음식점으로 팔려 표지 하나 붙어있지 않고, 홍지동 산장도 남에게 넘어가 있습니다. 해방 후『돌베개』,『원효대사』를 쓰신 사릉댁도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문화국가가 되려면 이런 문화유산을 존중하고 관리할 줄 알아야 함은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그동안 정치적 이유인지 너무 등한시해왔습니다. 특히 사릉에는 터도 좋고 위치도 좋으니 남양주군에서 춘원문학관을 지어 다산 정약용의 실학루트와 연결하여 개발관리하면 참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 춘원 이광수 선생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최 교수님은 작년‘춘원연구학보’제6호에‘해방 후 춘원의 삶과 생각’이란 논문에서‘이제 춘원 이광수에 대해 집단 심리적 오해와 왜곡에서 벗어나 역사적 인간적 진실을 바라볼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인지요?

위에서 학술적으로 춘원연구가 제대로 되기 시작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언제나 학술연구에 기초하여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춘원의 예술적, 작가적 위대성에다 사상적, 지성적인 면으로도 조명해야 할 면이 크다고 생각하고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문화국가이지요. 민주국가, 다원사회에서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춘원의 과오만 지적하면서 그보다 더 큰 공헌과 장점을 묵살시키는 국가적 손실은 이제부터라도 지양되어야 하겠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특히 춘원이 살았던 러시아의 바이칼과 치타에는 문학비와 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지면 좋을 것입니다. 지금 그쪽으로 여행하는 한국인이 일년에 4천명에 이른다 하는데 남의 나라 산천만이 아니라 우리 선배의 독립운동과 문화적 발자취를 보고 느끼게 한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국민적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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