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조수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고음에서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끼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관객들이 웅성대자 지휘자가 지휘대에서 내려와 조수미 등에 태엽을 대고 돌리자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계속한다. 이 노래는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인형의 노래’다. 이렇게 여자성악가 중에 가장 높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가수를 콜로라투라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콜로라투라의 아리아로 이‘인형의 노래’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아리아가 있다.
또 캉캉 춤의 음악으로도 유명한 오펜바흐의 음악세계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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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바흐 |
유태인 오펜바흐
오펜바흐는 1819년 6월 20일 쾰른에서 성가대의 선창자, 음악교사이자 작곡가인 이자크 유다 에버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칙령으로 유태인은 이어온 가족성을 바꿀 것이 요구된 때라 독일의 오펜바흐 암 마인의 출신인 아버지는 성을 오펜바흐로 바꾸어 그의 아들에게는 출생 시 야곱 오펜바흐란 이름을 지어줬다.
프랑스로 이주해 음악가로서 성장
오펜바흐는 프랑스에 정착한 후 프랑스식 이름 '자크'로 바꾸었다. 1833년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워 첼로 주자로서 인정을 받아 1849년에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관현악단원으로 생활했고, 1850년에는 프랑수와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5년 후 몽시니 거리에서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자신의 소극장을 설립하였다. 극장주 겸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그 뒤 3년간에 오페레타를 30편 이상 발표했는데, 프랑스의 오페라가 전통적 그랜드 오페라 형식만을 고집할 때, 무거운 오페라의 형식에서 벗어나 유쾌하고 재미난 오페레타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오페라에서는 대화조의 대사를 대사 전달에 적합한 멜로디를 가미한 레치타티브로 처리했으나, 오펜바흐는 일상적인 대화형식으로 처리해 사실적 전달을 더했다. 또 거기에 코미디와 세대풍자를 가미했다. 풍자가 들어 있으면 서민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벼운 유머에 넘친 아름다운 가락과 매력 있는 내용으로 차츰 명성을 높였고, 마침내 ‘프랑스 희극의 창시자’로 불렸다.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
오펜바흐의 마지막 오페라인 ‘호프만의 이야기’는 그의 다른 작품보다 진지한 편인데,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친구인 에르네스트 기로에 의해 완성되고, 1881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19세기의 뉘른베르크, 로마, 뮌헨, 베네치아 등의 도시다. 막이 오르면 작가 호프만이 술집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세 가지 연애담을 말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형과의 어리석은 사랑이다. 과학자가 발명한 자동인형 올랭피아, 원격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이 인형에 호프만은 한눈에 반한다. 그야말로 인형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올랭피아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한 무도회에서 호프만이 올랭피아를 진짜 사람으로 믿게 만든 마법의 안경을 떨어뜨리면서 올랭피아의 실체를 보게 된다. 첫사랑의 환상은 이렇게 깨지고 만다.
두 번째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퇴폐적 속물근성으로 물든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 줄리에타와의 사랑 이야기다. 웃음을 파는 그녀는 정부가 있었는데, 정부의 영혼은 악마가 소유하고 있다. 줄리에타의 미모에 마음이 끌린 호프만은 악마의 계략에 의해 그녀의 정부와 결투를 벌이고 결국 그를 죽인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귀찮은 정부를 제거한 호프만이 아닌, 또 다른 연인과 곤돌라에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이에 호프만은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세 번째는 노래하는 가수와의 허무한 사랑이다. 음악가의 딸이며 재주 있고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안토니아. 하지만 워낙 몸이 약해 노래하는 것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 그녀와 약혼까지 하지만 그녀는 악마의 마수에 걸린 의사의 청으로 노래를 부르다 죽음으로써 호프만을 떠난다. 호프만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박수를 치다 나가고, 이후 잠이 든 호프만에게 시의 여신들이 나타나 그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인형의 노래’와‘뱃노래’가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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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의 소재가 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
오페레타‘천국과 지옥’
그의 명성을 천하에 날린 것은 1858년 10월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천국과 지옥’이다. 초연 당시에는 2막이었으나 후에 4막으로 증편되었다. 원래 제목은‘지옥의 오르페우스’지만 우리에게는‘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페레타의 진수라고도 할 만한 작품으로, 서곡이 가장 유명하며, 피날레부분의 음악은 프렌치 캉캉 음악으로 세계를 휩쓸었다.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의 신화이야기로, 오르페우스라는 음악가가 아름다운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를 아내로 맞이했다. 어느 날 산책을 나갔는데, 양치기가 에우리디케를 붙잡아가려고 해 놀라서 피하려던 그녀는 그만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말았다. 슬픔에 젖어 있던 오르페우스는 죽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지하세계로 내려가고 그의 슬픈 음악을 들은 지하세계의 여왕은 오르페우스에게 아내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건은 지하 세계를 다 벗어날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상을 향해 묵묵히 걷던 그는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해 지상에 거의 다 왔을 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세계로 끌려갔고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의 청혼도 거절해가며 슬픔에 빠져 있던 오르페우스는 여인들이 던진 돌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이다. 경박한 상류사회를 풍자한 것으로 내용과 대사는 희극이었지만 음악만은 지금까지도 즐겨 연주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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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바흐 묘지 |
오펜바흐의 죽음
오펜바흐는 파리에서 죽을 때까지 대부분 오페레타와 오페라 코미크에 헌신하며, 작곡가, 감독으로서의 성공을 거뒀다. 또한 미국과 영국을 방문, 해외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그는 작곡자인 동시에 지휘자이기도 했는데, 생애에 쓴 희가극은 약 90편이고, 주로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880년 10월 5일 파리에서 타계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묘지에 묻혀있다.
기자후기
삐에로와 광대, 그리고 코미디언들, 그들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그 웃음 뒤에는 남모르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할 때가 있다. 개인적인 슬픔이 있어도 돈을 벌어야 하고 직업이기 때문에 웃겨야 사는 것이다. 오펜바흐는 오페레타의 내용을 코미디에 가까운 이야기로 만들며 관객들에게 웃음과 세대풍자를 통한 통쾌함을 맛 볼 수 있게 해주었지만, 젊은 시절의 고뇌와 슬픔이 담긴 아름답고 애절한 음악들은 상업적 성공 속에 진지한 예술가로서의 평가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첼로곡‘재클린의 눈물’은 비하인드 스토리도 인상적이지만 기본적으로 곡이 가진 슬픔의 선율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가슴 저리게 하는 것 같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의 장미를 이스라엘의 선인장이 죽였다’라는 표현으로 재클린과 바렌보임에 대해 이야기 한다. 투병 중에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자들과의 인터뷰 때도 원망하지 않고 칭찬을 했다는 재클린, 젊은 시절 건강하고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으로 남편의 기억 속에 남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도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다니엘 바렌보임, 나중에 하늘에서 재클린을 다시 만나면 그녀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었으면 하는 게 기자의 개인적인 바람이다. 지금도 첼로의 슬픈 선율이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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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느끼는 모든 슬픔이 담긴 첼로곡
‘재클린의 눈물’
늘씬한 몸매와 금발의 아름다운 천재 첼리스트 소녀, 재클린은 5살 때부터 첼로를 시작해 16세에 리사이틀을 해 데뷔했으며, 17세에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협연하게 되는데, 이후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각광을 받으며 스타가 된다. 그리고 23세 때 피아니스트이자 젊은 지휘자였던 유태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며, 슈만과 클라라 이후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가의 결합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28세인 1974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을 얻게 되는데, 그녀가 투병하는 중에 남편 바렌보임은 점점 더 유명세를 타며 승승장구하고, 결국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와 동거를 하며 아내 재클린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원인도 알 수 없이 신경들이 죽어가는 그 병의 끝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던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함께 만든 음반을 들으며 19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동시대에 독일의 첼리스트 토마스 베르너가 오펜바흐의 미발표곡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곡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재클린이 연주한 이 곡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재클린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악과 사랑과 목숨을 천천히 잃어가는 절망을 겪으면서도 울 수조차 없는 병을 가진 그녀였기에,‘눈물’이라는 제목이 주는 의미는 아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