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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일반

연변의 조선족

 

글 이건륭 길림성 지사장

 

   

▲ 귀화입적한 조선인 어린이들

 

연변에는 현재 80만에 달하는 조선족이 살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945년6월까지 동북에는 216만 3,115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때까지 조선족을 조선인, 고려인, 선인(.人)으로 불렀다. 광복 후 동북에 동북국이 서고, 이어서 중공길림성위원회가 서면서 연변의 조선족을 점차 조선인이 아닌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규정지었다. 동북국에서는 1945년 9월 말에“화북(.北)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조선의용군(.勇.)을 제외한 동북의 조선인 거주민은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과 같다”고 인정했다. 1948년 12월에 중공 연변지위서기 류준수(.俊秀)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연변 경내에 거주하는 조선인민은 중국 경내의 조선 소수민족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승인한다. 민주정부는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민에게 토지권, 인권, 재정권을 주고 생명과 생산안전을 보장한다.”그리고“무릇 과거에 연변지구에 거주하였거나 토지개혁에서 이미 당지 민주정부에 호적가입을 신청한 사람은 중국공민으로 한다.”고 선포했다. 1952년 9월 3일 연길에서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세워졌다. 이때로부터 조선인, 고려인은 조선족으로 불려졌다.

조선족은 언제부터 동북에 들어왔는가? 흑룡강성 녕안청의 『고기(古.)』에 따르면 18세기 60년대에“동경성일대에 약 4,000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어 그 세력이 중국인을 눌렀기에‘귀화조선인’을 제외하고, 그 외의 조선인을 전부 쫓았다.”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기에 조선인들이 이미 동북의 여러 지방에 모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변의 조선족은 언제 연변에 들어왔는가? 19세기 중엽에 아편전쟁이 끝나자 제국주의 렬강들을 중국을 분할했는데, 그 중 짜리러시아가 욕심이 가장 많았다. 짜리러시아는 무능한 청 정부를 핍박하여‘중로애훈조약’과‘중러북경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 짜리러시아는 흑룡강 이북의 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땅과 우쑤리강 이동의 4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을 떼여갔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제야 청 정부는“야단났다. 저놈들이 우리 조상의 땅마저 몽땅 집어삼키려 하는구나.”하면서 부득불 성지(.地)인 장백산 일대의 봉금령을 폐지하고,‘이민실변(移民..)’정책을 실시했다.

‘이민실변’정책은 한나라 때의 조착이 내놓은‘수변권농소(守...疏)’와‘모민실새(募民.塞疏)’에서 따온 것이다. 즉 중원의 백성을 변방에 보내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변방을 수비하게 하는 것이다. 즉 방어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청 정부에서는 1881년에 훈춘에 간국(.局)을 세우고, 개간지역을 지정했다. 연변에 들어온 첫 이민(移民)은 조선인이 아니라 산동성의 등주, 채주, 청주 일대의 중국인 200여 명이다. 200여 명의 중국인들은 1881년에 만리길을 걸어 연변에 왔다. 그런데 따뜻한 평원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날씨가 차고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연변에 들어오고 보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이런 험한 곳에 속여 오다니 원통하구나.”하면서 후회했다. 그들은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관아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는 조선인들을 찾아가 관청에서 내어준 땅과 농기구들은 헐값으로 팔아먹거나 소작을 주었다. 그리고는 산에 들어가 사냥을 하거나 금을 캤다.

청 정부가 간국을 세운 것은 중원의 중국인들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불러오는 일이 리상적이 되지 못하자 이번에는 월간국(越.局)을 세우고 조선인들은 불러들였다. 월간국을 세우기 전에 연변일대에는 이미 조선인들이 들어와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청 정부 관아에서는 이들을 묵인했지만, 때론 이들의 량곡을 수탈하고 세금을 받아들였으며, 때론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때 조선 관아에서 극성스럽게“월강죄인”들을 되돌려보내라고 청에 요청했는데, 청에서는 외교상 어쩔 수 없이 몇 명을 잡아서 되돌려보내곤 했다. 되돌아간 사람은 목이 날아났다. 청 정부에서‘이민실변(移民..)’하려고 월간국(越.局)을 세우자 조선에서 이민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청 정부에서는 이민들에게 요역과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그리고 귀화입적을 강요했으며 귀화입적한 조선인들은 청국인과 똑같이 대한다고 했다. 청 정부는 뒤이어 화룡욕통상총국(和..通商.局)을 설치하고, 무간국(..局)으로 개칭하면서 조선인들을 안치시키기에 바빴다.

 

   

▲ 20년대 룡정의 소시장거리

 

청 정부에서는 1889년부터 1994년 사이에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대안지역에 진원보, 녕원보, 수원보, 안원보 등 4개 보(堡)에, 그 아래에 39개 사(社)를 두고, 그 아래에 또 124개 갑(甲), 415개 패(牌)로 나누어 조선인들을 편입시키고 통제했다. 그런데 1906년에는 연변의 조선인이 한족이나 만족보다 훨씬 많았다. 청 정부에서는“두만강 이북일대의 월간 조선인은 황제의 은혜를 받아 치발역복하여 과거에는 천조의 번속(藩.)이 되였으나 지금은 천조의 번민(藩民)이 되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리고 지방관청과 관병들에게 이주민의 량식, 마초, 가축 등을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정책으로 당시 연길청 관할 내의 조선인 호수(..)만 해도 9,925호(.)나 되었고, 개간한 토지는 무려 56,968.8헥타르나 되였다.

1908년, 연길청에서 생산한 곡식은 조 421,092석, 기장쌀 9,558석. 보리 43,864석, 밀 132,611석, 콩 184,907석, 수수 397,698석, 옥수수 20.052석에 달했다고 자료는 밝혔다. 훈춘청의 곡식도 연길청과 비슷했다. 이처럼 연변의 이주민들은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연변을 곡창으로 만들었다. 연변의 곡식은 조선 륙읍에 수출되었고, 일부는 청국의 군량으로, 그리고 일부는 관아에서 가져갔다. 조선 륙읍에 해마다 수출한 콩만 해도 24,000여 석에 달했고, 교역액이 72,000원에 달했다.

수전은 두만강 류역 개산툰 일대의 종성외자(개산툰진 자동촌)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였다. 그때가 1890년이다. 그후 수전농사는 빠르게 보급되였는데, 1906년 룡정의 대교 일대에서는 수로를 1,308메터나 빼고 강물을 끌어들여 33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1900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전에 연변에 들어온 조선인들은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봉금시기에 청인들의 고용인이나 양자로 들어온 사람들이고, 둘째는 오지에 잠입하여 도적농사를 한 사람들이였고, 셋째는 이민실변정책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넷째는 4보 39사가 설치된 후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1900년 전에 연변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귀화입적하고 치발역복했다. 또 일부는 점산호(占山.)가 되어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이때 연변일대의 조선족은 인구의 80% 이상이어서 조선족사회가 형성되었다.

 

   

▲ 타작을 하는 조선인 농민들

 

연변에 더욱 많은 조선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1910년대부터다. 일본은‘한일합방’을 통해서 조선을 손에 넣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공공연히‘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1918년에 이르러 15만 9,400정보에 달하는 토지를 략탈했다. 그 토지는 고스란히 일본식민회사와 일본인의 소유로 되였다. 일제침략의 선봉이 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줄기차게 토지를 략탈했는데, 1930년에 이르러서는 123만 5천여 정보의 토지를 빼앗아냈다.

이외에도‘삼림령’,‘국유삼림산야보호규칙’,‘화전지과세’등 정책과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조선인의 유일한 생계수단마저 빼앗아냈다. 이리하여 땅을 잃은 백성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가에 몰려들었다. 나라를 구할 구국의 뜻을 품은 애국지사들도 그 속에 있었다. 이 시기에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대폭 늘어났는데, 1912년에 16만 3천여 명으로, 1925년에는 34만 6천여 명, 1931년에는 38만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36년 8월에“백만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인을 대폭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이에 호응하여 조선총독부와 괴뢰만주국에서는1936년 8월에 일본관동군이 제정한‘재만 조선인 지도요강’과 따라1937년부터 조선의 파산민을 동만지역(연변)과 동변도(두만강, 압록강 연안)의 23개현에 해마다 1만 세대씩 이주시킬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1938년에는 이주계획을 남만과 북만의 39개현으로 확대했다. 조선의‘선만척식회사’에서는 1937년 한 해에만 조선 남부지역에서 2천 5백여 세대의 농민들을 속여 간도성과 봉천성에 이주시켰다. 통계에 따르면, 1937년부터 1942년까지 도합 4만 3,832세대의 조선인들이 동북에 집단이주를 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국내의 군사공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과 중국 동북으로부터 수많은 로동자들을 일본에 압송하여 광산과 탄갱, 공장에 들여보냈다. 이때부터 동북에 오는 이민자들이 줄었다.

1942년에 이르러 동북의 조선인 인구는 2백만에 이르렀고, 연변의 인구는 80만에 이르렀다. 광복 전인 1945년 6월에 이르러 동북의 조선인은 2백 16만명에 달했다. 광복이 나자 2백 16만의 조선인 가운데서 절반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제시기의 헌병, 경찰, 특무, 앞잡이들과 지주, 건달, 마약군, 고리대업자들도 거의 모두가 남쪽으로 달아났다. 연변에서는 토지개혁과 더불어 일본의 앞잡이와 지주, 고리대업자를 청산하는 투쟁, 그리고 일제의 잔여세력과 토비를 숙청하는 싸움이 치렬하게 벌어졌다. 그 후 1952년9월에 연변조선족자치구(후에 자치주로 변경)가 설립되면서 연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따라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