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월간구독신청

지자체 일반

백두산에 세워진 종덕사

  백두산 천지가에 일찍이 종덕사란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종덕사는 바로 천지물이 흘러나오는 천지 동북쪽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빈자리만 남아 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옛적에는 향연이 그치지 않았다.

  속명 팔괘묘라고 불리운 종덕사는 원래 200m2 남짓한 팔각형 절이었다. 이 절은 홍송널판자로 지었는데 지금은 그 형태를 더는 보아낼 수 없다. 다만 여덟 개의 방석돌 등이 원 모양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다.

  절의 벽은 세 겹으로 되었는데 바깥 벽은 길이가 같지 않은 팔각형 모양이다. 사이 벽은 사각형 모양이고 안쪽 벽은 정팔각형 모양이다. 절의 서남쪽 몇 미터밖에 온돌을 놓은 토목결구의 침방이 하나 있었다.

  1986년 전까지만 해도 종덕사의 이름이 분명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숭덕사(崇德寺)로 부르고, 어떤 이들은 존덕사(尊德寺), 송덕사(宋德寺)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던 1986년 9월에 절터에서 종덕사(宗德寺)라고 쓰여진 종 조각이 발견된 후부터 종덕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종덕사가 세워진 년대에 대한 해답도 각이하다. 어떤 기재에는 1929년에 지었다고 하지만 일설은 1931년도라고 한다. 1964년도에 종덕사를 현지 답사한 적이 있는 장백산보호국 전임국장 리주철의 답사기록은 이와 다르다. 그가 종덕사를 답사할 때 여러 개의 비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절의 제일 안쪽에 높이 70㎝, 너비 40㎝, 두께 8㎝ 좌우의 목패가 있었는데 목패에는 절을 세운 내용이 쓰여 있었다. 목패에는 무진년 4월 5일에 최시현이 패를 세웠다고 쓰여 있었다. 무진년이면 1928년이다. 이로 보아 종덕사를 세운 시간은 1928년을 넘기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1991년 11월 중순, 필자는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촌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촌의 최석도, 최용철, 김남석 등 여러 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72세의 최석도 로인은 고맙게도 종덕사에 대해 알려주었다. 로인의 말씀에 따르면 절의 이름은 종덕사가 옳은데 본세기 20년대에 조선북부의‘덩덕궁’패들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에 조선을 통치한 일본인들은 조선사람들의 상투머리를‘좀마개’라고 부르면서 가는 곳마다 가위를 들고 상투를 베어 버렸다. 이에 반일정서가 짙은 덕덕궁패들은 일본놈들의 꼴이 보기 싫다며 장백산 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그때는‘진대나무 우거진 곳이 피난처’란 말이 있었는데 참솔이 우거진 송풍라월이 가장 리상적인 곳이었다. 그래서 이도백하를 망라한 여덟 곳의 송풍라월이  덩덕궁패의 활무대가 되였다. 그들은 백두산 천지가에 절을 세우기로 했다. 헌데 천지가에는 나무가 없어 15리 떨어진 곳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야 했다. 그때 지금의 조선 삼지연군과 중국측 내두산의 조선인들이 적잖게 나섰다. 조선인들은 지혜를 모아 15리를 오르내리면서 홍송을 운반했다. 당시 절을 건설하는 데 일꾼 30명이 동원되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직전에 최 로인은 백두산 꼭대기와 천지를 두루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세 겹으로 된 절과 그 옆의 사택 그리고 절의 한복판에 여러 개의 부처와 종이 그대로 있더라고 이야기했다. 한때 반일지사들이 운집했던 종덕사! 그 옛터는 오늘도 소리없이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종덕사에 대한 이야기가 다행히도 조선 김일성의 회고록에 나온다. 회고록을 펼치면 김일성이 1928년에 내두산 마을에 갔을 때 마침 천불교 신자들의 기도날이어서 신자들이 머리를 틀어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꽹과리와 제금을 치고 북과 목탁을 두드리며 노는데 그 덩덕궁 소리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때 교주가 장두범이었는데 그는 한때 독립군에서 싸우다가 독립군이 맥을 추지 못하자 총을 던지고 내두산에 들어와 왜놈에게 천벌을 내려주십사 하고 빌었단다. 이것이 점차 신앙이 되여‘천불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 백두산 천지가와 내두산 마을에 모두 절이 있었는데 장두범 등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노는 그 소리가‘덩덕궁, 덩덕궁’한다고 민간에서는 절의 이름을 아예 덩덕궁이라고 불렀고 천불교 신자들을 덩덕궁패라고 불렀다. 종덕사는 반일우국의 뜻이 배인 사찰이자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사찰이라는 데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