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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1927~2015). 국가장 엄수

군정 종식시킨 30년 민주화 운동의 거두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26세 최연소, 9선 의원 – 박대통령 “깊은 애도”


PYH2015112203620001300.jpg▲ 1992년 10월 당시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오전 12시 22분 숨을 거뒀다. 2008년 8월 18일 서거한 정치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뒤를 따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광복 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야당의 지도자로 정치를 시작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정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정치권의 거목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신시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될 때 "순교의 언덕,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저 절두산이 준 역사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냈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증세로 치료를 받던 도중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전했다. 오 원장은 오전 2시 "김 전 대통령이 0시 22분 서거했다."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공식발표했다. 오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하셨고,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송해 치료했지만 상태가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오 원장은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폐혈증 급성신부전'이라고 밝혔다. 오 원장에 따르면 차남 김현철 씨 등 가족들은 김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켰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가장 먼저 찾아와 고인을 애도했다.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인 문정수 전 부산시장을 비롯해 차남 김현철 씨와 민주산악회 이상천 회장, 김재철 YS사랑산악회장, 민정열 민주동지회 사무총장,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등 지인들이 모여 들었다.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른 시각부터 시민들이 찾아와 조문을 하는 등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장례는 정부와 유족의 합의에 따라 국가장으로 5일장으로 치러지며,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한편, 해외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서거 소식을 보고받은 후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이 전했다.
 
파란만장한 정치굴곡과 양김의 애증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은 최연소 국회의원, 9선 의원, 3번의 야당 총수, 문민정부 대통령까지 한편의 드라마였다. 1927년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영남권의 정치거물로, 호남권을 대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어왔다. 1955년 민주당 창당발기인 33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야당생활을 오래 한 정치인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나섰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9년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다 1971년 신민당 대권 경선에서 처음 맞붙었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겼지만, 2차 투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하고 만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거를 돕는 한편, 함께 유신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게 된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에 의해 탄압을 받을 당시 두 사람은 민주화의 동지로 함께 투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미국으로 망명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 조치를 당하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5․18 광주항쟁 4주기 때 23일간의 단식을 하게 되고, 이때서야 가택연금이 해제됐다. 이 단식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6·10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두 사람은 1987년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내지만,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87년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길목에서 끝내 갈라서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0년 1월 22일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며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설명했다. 이때부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이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게 된다. 둘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잠시 정계를 떠났다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시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제도를 도입하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거액 수뢰혐의와 12․12와 5․17 반란 주도 혐의로 각각 구속수감하고, 비자금을 수사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했다. OECD 가입과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성과가 있지만, IMF 금융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DJP연합을 통해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IMF 위기를 극복했다. 두 사람이 이룩한 민주화의 업적이 크지만, 지역주의를 양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의 화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병문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자신과의 관계를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면서 "오랜 동지적 관계에 있었고 또 경쟁관계에 있었다. 애증이 교차한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두 거목의 화해는 영호남으로 갈라진 한국 정치사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으로 평가된다.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통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끝까지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내며 박정희 군사정권과 대립했고,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독재자의 딸’과 같이 거친 표현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정치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1999년 이회창 총재와의 회동에서 “국민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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