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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문화-한국 가곡의 아버지 작곡가 홍난파

음악은 그 시대상을 말하는 문화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예술의 가치는 그대로 보존되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대한뉴스 조선영기자)=‘홍난파의집’(종로구 홍파동 등록문화재 제90)은 작년 1226일과 27일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에서 한국가곡의 세계화를 위한 송년기획공연 홍난파가곡제를 열었다. 시대의 희로애락이 담긴 홍난파 선생의 작품과 함께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 가곡을 노래했다.

타임머신으로 시간을 1900년대로 되돌려 본다. 유럽의 어떠한 예술가곡보다도 아름다운 선율로, 또한 그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설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우리의 가곡 봉선화’ ‘봄처녀’ ‘사랑’ ‘성불사의 밤등을 작곡한 홍난파가 떠오른다. 1942년 도쿄의 히비야 공원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전일본신인음악회가 열렸는데 무사시노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생 대표로 23세의 조선인 여학생이 노래를 불렀다. 흰 한복의 여학생 소프라노 김천애는 앙코르를 받자 기다린 듯 노래를 시작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내모양이 처량하다~’ 그곳에 있던 조선인들은 그녀의 목 놓아 우는 노래 소리에 다 같이 감격해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한다. 홍난파의 가곡<봉선화>가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바로 그 순간이다. 43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우리나라 근대음악 역사에 빠질 수 없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홍난파를 만나러 떠나보자.

 

개화의 중심 정동에 자리 잡은 홍난파 가족

19세기 말 나라가 점점 빛을 잃어가던 1898, 난파 홍영후는 수원에서 태어났다. 1년 후 서울에서 유학하던 형인 석후의 집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오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정동이다. 당시 정동은 외교공간이 들어서고 서양인들이 모여들면서 서양인마을로 형성되어 서양식 교육과 의술, 문화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수궁(당시 경인궁)옆에 대한제국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 찬송가와 여러 서양악기와 오르간의 합주 소리 등 어린 시절의 환경이 자연스레 난파 그의 마음속에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우리나라의 근대음악을 이끌어가는 선구자로 자라게 한 것이다.

 

평생 동반자였던 바이올린과의 만남으로 맺어진 서양 음악과의 인연

홍난파의 가족은 정동교회를 다니던 개화된 집안으로 난파는 늘 음악 속에 있었지만 11세 때 처음으로 완구 악기를 가지고 악보 보는 것을 배웠고 찬송가로 음악의 기초를 경험한다. 다음해 YMCA중학부에 진학한 그는 학교합창단원과 교회찬양대의 활동을 통해 합창을 경험하고 점차 다른 연주 악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3세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가지게 되는데 그날 하룻밤에 혼자 어깨 너머로만 봐오던 바이올린의 4현을 모두 익혔다. 그리고 그의 음악인생의 스승인 당시 YMCA중학부 음악교사인 김인식과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김인식은 서양음악의 개척자로 난파와는 사제 관계 외에 훗날 같이 음악활동을 하는 예술가로 계속 이어진다.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회를 통해 성장하듯 15세 때 처음 성탄축하음악회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고 그 후 교회를 순회하며 연주가의 삶을 시작한다.

 

일본유학으로 시작된 홍난파의 다양한 예술세계

20세가 되던 1918년 교사로 있던 조선정악전습소를 그만두고 첫 번째 일본유학을 떠나게 된다.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해 음악공부 외에 평론과 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음악, 미술, 문학을 주제로 한 잡지삼광을 창간한다. 비록 3호로 막을 내리지만 그의 음악적 감성이 문학에서도 발휘되어 번역이나 수필 등 많은 창작의 성과를 얻는다. 19193.1운동 이전에 일본의 600여명의 유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2.8 독립선언서에 연루된 홍난파는 본과에 진학하지 못한 채 검거를 피해 귀국하게 되는데 미국 유학의 꿈도 비자발급이 어려워 접어야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나지만 불온사상을 이유로 복학이 거절되자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우리 민족의 한과 설움을 담은 가곡 봉선화의 탄생

귀국길에 홍난파는 나라 잃은 유학생의 비통함과 함께 젊은 음악도의 열정이 한순간 좌절되어 절망감을 느끼지만 그 순간의 절망조차 음악으로 표현해 기악곡<애수>를 탄생시킨다. 그의 첫 창작소설집 처녀혼의 맨 첫 장에 이 곡이 실리는데 가곡 봉선화의 멜로디이다. 이 곡은 처음에 가사가 없는 기악곡으로 1925년 성악가 김형준에 의해 성악곡으로 완성되는데 노랫말 속에 조국을 시들어가는 봉선화로 비유하고 핍박 속에 자유를 바라는 우리민족의 설움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곡은 처음부터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1942년 소프라노 김천애가 앙코르곡으로 부르면서 알려져 전국으로 퍼지자 급기야 금지곡이 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사상불경죄로 잡혀가게 된다. 그럴수록 우리국민에게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애국에의 감정이 더욱 깊이 이입되어 불려졌다.

 

서양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선 음악보급운동

국내에서 700명의 관객을 수용 할 수 있는 단성사에서의 연주회가 단 7명의 관객만으로 텅 빈 객석이 되자 난파는 우리나라의 서양음악보급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지방으로 무료순회공연을 하고 유학을 가지 않아도 서양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연악회라는 음악연구기관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1920년대에 난파는 서양음악의 대중화에 힘쓰며 연주활동도 아주 활발히 했다. 그리고 1926년에 다시 세 번째로 일본에 유학을 떠나 일본최초의 사립음악학교인 동경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게 된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 연악회를 더욱 활성화시켜 음악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작곡 또한 활발히 하여 조선동요백곡집을 출간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고향의 봄’ ‘오빠생각’ ‘ 낮에 나온 반달등이 이때 작품이다. 많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교육에 힘쓰며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홍난파는 배움에 대한 갈증을 참지 못하고 1931년 미국 시카고에서 17개월의 유학생활을 한다

 

미국 유학생활 이후의 음악활동과 수양동우회그리고 생의 마감

미국에서 돌아온 난파는 여전히 후진 양성을 위해 매진하고 <조선가요작곡집>을 출판하며 장안사’ ‘옛동산에 올라’ ‘사랑등 주옥같은 가곡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바이올린 3중주로 난파트리오라는 최초의 실내악단을 만들어 활동했고 많은 글을 신문과 잡지에 싣고 대중가요의 작곡활동도 계속했다.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는 미국에서 유학중일 때 가입한 흥사단의 조직으로 국내에서도 활동을 계속해왔는데 총독부에 발각되어 무려 181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족운동의 많은 이들이 나중에 친일파로 발목 잡히게 되었는데 안타깝게 홍난파도 그 중 하나다.

결국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석방된 홍난파는 다시 지휘봉을 잡았고 경성음악전문학원의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그의 오케스트라를 향한 남다른 열정은 계속 식을 줄 몰랐다. 홍파동의 집에서 삶의 마지막까지 유성기로 음악을 들으며 내가 죽으면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늑막염으로 생을 마감했다.

 

기자 뒷말

기자가 유학시절 빈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북한의 유학생들과 함께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홍난파의 동요 고향의 봄이 북한에서도 우리와 똑같이 불리는 것에 놀랐었다. 그래서 약간의 음주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합창을 했었던 추억이 있다. 멀리 타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거나 어쩌다 태극기나 우리의 한복이 눈에 띄면 얼마나 반갑고 가슴저린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홍난파의 가곡을 들으며 그 곡에 묻어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 그의 슬픔과 외로움을 그대로 느끼며 가슴속에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기자는 최근 거의 20일간 출퇴근길에 홍난파의 음악을 다시 들으며 그의 음악이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싶었다. 음악가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내는 자가 진정한 음악가이다. 같은 곡을 가지고도 연주자에 따라 청중의 기분에 따라 그 세계는 달라진다. 그래서 한마디로 그 사람의 삶을 단정지을 수 없는 것 또한 음악가의 삶이다. 그의 음악 외에 다른 관점에서 본 홍난파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눈을 감고 영화 속에 한 장면을 떠올린다.

개화기 때의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들, 양장을 한 신여성들, 전차가 다니는 거리, 그 속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주인공 젊은 난파의 모습과 함께 그 옆에서 ~’ 를 연발하며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신기하게 그를 쳐다보며 연주를 듣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살짝 합성시켜본다.

 

사진제공 단대 난파홍영후전시실 소장(석주선기념박물관제공)

프로필 사진
조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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