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글·사진 김윤옥 기자
편집기획자로서 본지 발행인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여러 달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2011년 9월호부터 연재하기로 한 것은 본지 발행인과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수많은 인물과 관련이 있다. 일화를 입증하는 인물들이 생존해 계실 때 글과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리, 사람의 정, 행복에 관한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본지 발행인이 걸어온 길을 보면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행복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길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학문, 배경과 같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간다면 발행인은 그렇지 않다. 발행인은 가난했기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고 외로웠기에 정직할 수밖에 없었다며 가난과 외로움이 오늘의 재산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내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언제든지 지적해주소”라고 말한다. 직원들만 듣고 지나기에는 너무 귀한 인연들, 특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이종무 씨와 발행인의 인연은 약 20년 전 OB 투수 박정호 씨의 소개로 시작됐다. 당시 그는 하남시에서 3,000여 평의 가든(음식점)을 하고 있을 때이다. 어느 날 박정호 씨는 “형님, 우리 가든 밑에 공장 간판 걸고 사업하는 아주 성실한 젊은 친구가 있는데 형님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하며 가든 마당에서 발행인과 젊은이의 만남을 주선한다.
젊은이는 사업을 시작하며 무허가인 공장이라 전기시설이나 여타 설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한창 골치 아플 때였다. 젊은 친구와 몇 마디 말을 건넨 후 발행인은 “너무 염려하지 말게나. 자네 관상을 보니 나하고 인연이 되어 장가도 갈 것이고 안심하고 일 할 수 있는 큰 공장도 살 수 있을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의아한 눈초리로 발행인을 보며 마음에 새겨듣지는 않았단다.
얼마 후 이 젊은이는 발행인의 중매로 장가를 가게 되었으며 자기의 공장을 갖게 되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지난 9월호 김영섭 원장 편에 나오는 1,500만 원짜리 산삼을 먹은 주인공 이종무 씨다. 기자는 지난 9월호 인연을 취재하며 어떤 분이기에 발행인의 말 한마디에 그 비싼 산삼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던 차 두 분의 행적을 따라가다 그 내막을 알게 됐다.
첫 만남
이종무 씨의 말이다. “전 원래 언론 쪽 이미지를 안 좋게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처음 만났는데 장가를 보내준다느니 공장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등 아무리 친분이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쉽사리 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 형님을 좀 이상하게 봤습니다.” 이에 발행인은 말한다. “이 친구 첫인상 거만했죠. 남을 업신여기는 거만이 아니라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죠. 오기가 나더군요. 어디 두고 보자. 나중에는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게 할 것이다.”
산삼을 바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기자가 이종무 씨에게 한 첫 질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20여 년 전 1,500만 원인데 발행인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그 자리에서 비싼 산삼을 먹을 수 있었는지요?” “돈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형님이 돈이 급하다기에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백운당 한의원 원장님께서 심마니가 직접 캐온 거라 하시고 형님께서 먹으라고 하니 아무 생각 없이 흙만 털고 그 자리에서 먹었죠.” 발행인이 한마디 거든다. “이보시게! 우째 자네는 내게 조금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잔뿌리 하나 안 남기고 혼자 다 먹었나? 내 얼마나 섭했는지 아나? 내가 먹자 하면 자네가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은 못하고.” “아, 그랬죠.
산삼은 사람 운을 바꾼다며 형님이 먹으라 하기에 시키시는 대로 다 먹었을 뿐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형님에게 굉장히 믿음이 갔습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왜 이 생각 저 생각 없겠습니까? 허나 그때는 이미 형님이 말하면 무슨 말이든지 100% 따르던 때입니다. 보통 사람의 관계가 이익에 따라 변하는데 형님은 그런 것이 없는 분입니다. 제게는 집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소중한 은인이고 또한 사업하며 인간관계가 힘들어 어깨가 처질 때 찾아가 만나면 힘이 났습니다. 전혀 가식 없고 상대에게 어떤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시니 형님 말씀에 한 번도 노(No)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연은 따로 있다
시간이 좀 지나 발행인은 이종무 씨에게 선을 보라고 한다. “큰 기대 안 하고 약속 장소에 갔는데 웬 미모의 여인이 미소로 저를 반겨주는 거예요. 선 보고 얼마 안 가 결혼해서 지금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처음 말씀대로 장가를 보내주셨죠.” 발행인은 그때를 회상하며 “인연은 따로 있는 것 같아.
그 처자는 대기업의 비서실장으로 우아한 미모를 갖춰 저도 아우를 알기 전 다른 사람하고도 선을 보게 했었지. 청와대 경호실 계장으로 앞길도 유망하고 집안도 재력가이고 인물도 좋은 총각이었는데 처자는 한 번 만나보고는 거절하더군! 남자 쪽에서는 아주 좋아했는데…. 까다로운 사람이다 싶어 반신반의하면서도 사람의 인연은 모르는 것이니 아우에게 다시 소개를 해줬지. 두 사람은 주변 여건이나 이런 것 개의치 않고 인연이라고 기뻐하며 부부의 연을 맺었지!”
하늘과 자기 자신은 못 속이는 법이다
이종무 씨가 운이 좋은 것은 결혼식 때 현직 장관이 주례를 서고 내로라하는 분들이 하객으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니 사업도 점차 궤도에 오르게 되어 경기도 광주에 공장부지 1,000여 평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 땅을 소개해 준 사람도 발행인이다. 이종무 씨는 발행인에게 땅을 소개해 준 고마운 사례로 그 당시 1,000만 원을 주지만 발행인은 자네도 어려우니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고 나중에 회사가 잘되면 그때 용돈을 달라며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중매도 서주고 공장부지도 마련해주고 주변 좋은 인맥도 많이 생겨 발행인과의 만남이 뜸해진 어느 날 아우가 다시 찾아왔다. “형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상의 좀 드려야겠습니다. 회사가 부도났습니다.” 아우 회사가 잘 성장하리라 알고 있던 발행인은 깜짝 놀랐다.
1990년대 중반 사업 확장을 위해 27억 원짜리 기계를 수입해 놓았는데 공장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에 좋은 인맥이 많아도 원리원칙대로 아래서부터 일을 추진하던 이종무 씨는 4년간 허가를 못 받아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는 데다 부하직원이 특허 기술을 빼내가 경쟁사를 만드니 재판으로 골치 아플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지자체 선거와 총선에 주력하다 보니 원자재 수입도 제때에 제대로 들여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겨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형님, 저의 사정을 아는 친분 있는 보험회사 직원으로부터 공장에 불을 지르면 보험금이라도 타 어느 정도 변제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는 제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우야, 하늘과 자기 자신은 못 속이는 법이다. 사람의 도리로 풀어보자.
훌륭한 포수는 잠자는 짐승을 쏘지 않고 내 품에 날아오는 새는 잡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도가 났을 때 소란스러운 것은 자기 돈을 못 받을까봐 그러는 것이니 너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이들에게 손으로 일일이 편지를 써라. 그리고 직접 만나라.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어떤 짓을 하든 그대로 받아들여라.
네가 잘못을 해서 그들에게 손해를 입혔으니 그들 손에 죽은들 억울하겠느냐.” 이 말을 들은 이종무 씨는 그대로 실행하여 채권단을 만나 사과를 하고 솔직히 이야기하며 꼭 벌어 갚겠다고 하니 모두 수긍하며 조용히 물러났다고 한다. 이종무 씨는 말한다.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은 ‘부도가 나면 구속한다든지 하며 고성이 오가고 싸움이 나는데 이렇게 조용히 좋은 분위기로 끝난 것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후 청와대 사정특명반에서 지자체 비리와 관련하여 이종무 씨를 조사하다가 그의 고충을 알고는 도리어 오랜 숙원이었던 공장허가를 바로 나게 해주었다. 사업이 번창하여 채권자들에게 빚을 다 갚은 것은 물론이다.
발행인의 다른 재산 통장의 몇 억 현찰
카세트테이프 부품을 생산하는 성신전자가 사업의 궤도를 잡아갈 때 이종무 씨는 또 발행인을 찾아온다. “형님, 제가 사정이 있어 공장과 재산 전부를 형님 이름으로 해놓아야겠습니다.” 그저 아우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발행인은 거액의 세금고지서가 날아온 것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말 그대로 아우 전 재산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전부 발행인 이름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발행인은 아우를 찾아가 “공증을 하든지 아니면 가압류를 하든지 무슨 법적인 것을 해 놔라. 내가 자네 재산 다 들어먹으면 어쩌려고. 안 그러려면 자네 재산 다시 다 가져가든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형님 마음대로 하세요'라며 흐른 세월이 7년이라고 하자 이종무 씨가 8년이라고 한다.
발행인은 그간 오해를 많이 받았다. 은행에 밝은 친구는 발행인 통장에 수시 입출금이 가능한 몇 억 원이 쟁여 있으니 돈을 꿔달라 하고 세무서에 있는 친구는 행사에 후원이나 협찬을 해달라고 하는 통에 발행인은 구두쇠 아닌 구두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이종무 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발행인 앞으로 해놓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형님은 그냥 믿음이 가는 분입니다.
15년 전 100억 원이면 지금과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돈이고 그 공장 땅값만 해도 굉장한데 형님 앞으로 해놓은 것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한 적 없었습니다. 재산을 하도 가져가라고 하셔서 마지못해 다시 가져온 거죠.” 기자는 재차 물었다. “이렇게 잘 믿고 따르는 다른 분이 또 있나요?” 우문이었지만 역시 기대했던 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저도 사업하며 세상 물정 알 만큼 아는 사람인데 그럴리가요. 이 형님뿐입니다.”
기자 뒷말
21세기 내가 나도 못 믿는다고 하는 세상에 형제 간보다 더한 신뢰로 자기 재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또한 남의 재산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 노심초사했던 두 분의 인연을 보며 참 흐뭇했다. 이종무 씨와의 만남은 생각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발행인은 김영섭 원장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새삼 이종무 씨가 생각났지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만큼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하며 지냈다.
며칠 전 발행인과 잘 알고 지내는 하명희 음악학원 원장이 손님을 모시고 대한뉴스를 방문하였는데 대화 중 그 손님이 다니는 교회가 예전 이종무 씨가 다니던 명일동 명순교회인 것이다. 궁금하던 차에 그 손님에게 혹시 연락처를 알아봐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재산을 돌려준지 또 8년 만에 발행인과 이종무 씨와의 만남이 8월 말 대한뉴스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발행인은 말 그대로 이종무 씨가 무허가로 전기도 쓰기 어려웠던 공장에서 2평 모자라는 1,000평 공장을 사게 하고 또한 장가도 가게 해주고는 본인의 역할은 다 한 것 같아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다가 부도로 어려울 때 다시 길을 잡아주니 만에 하나라도 이종무 씨가 마음이 흔들려 공장에 불을 냈다면 빚도 못 갚고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을 텐데 인연을 잘 만났다.
또한 발행인은 상대가 믿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데 이종무 씨의 단순 담백함과 정직함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여 오늘날 아름다운 추억담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담으로 며칠 전 이종무 씨가 가회동 사무실로 오는 날 발행인은 손수 밥을 지었다.
“형님, 내 평생에 이렇게 맛있는 밥 처음입니다.”“그래? 다 똑같은 쌀로 한 것인데….” 그날 발행인은 적정 비율로 멥쌀과 찹쌀을 섞고 직원은 나가 있으라며 반찬을 직접 만들고 오후 2시까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아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우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정 아닌가”하며.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2년 10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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