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월간구독신청

연변의 조선족과 항일투쟁

 

   
▲ 중국의 동북항일련군 제2방면군의 전사들

중국서는 명년에 세계 반파쇼전쟁승리 70주기를 맞으면서 전민적인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중국에서의 반파쇼전쟁이라면 일본군과 싸운 전쟁을 말한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수백만의 중국인을 살해했는데 남경 한 곳에서만도 30만에 달하는 무고한 백성을 살해했다. 남경대학살은 중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럼 일본군은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연변에서 조선족을 얼마나 살해했는가? 정확한 숫자는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각 현, 시 민정국에는 항일투쟁시기에 희생된 3,100여 명의 렬사가 등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렬사로 밝혀진 렬사가  6천여 명이나 있다. 그리고 희생되었지만 정확히 이름을 모르는 렬사가 더욱 많다. 여기에는 무고한 백성들이 죽은 숫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군은 1932년과 1933년 2년 사이에 연길현 해란구를 포함한 연길현에서만도 1,700여 명의 백성과 유격대를 살해했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일제가 1937년 7월 7일에 북경 로 구교일대에 주둔한 중국군병영을 공격한 때를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북의 항일전쟁은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한 시간을 기준으로 일어났다. 연변의 항일전쟁은 일제가 연변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세운 1909년을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항일투쟁력사가 긴 연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손에 죽었는지를 그 누구도 모른다. 민정국에 등록된 렬사는 1930년부터 희생된 렬사들이다.

  1930년 10월, 연변에 동만특위가 선다. 당시에 동북을 지리적으로 북만주, 남만주, 동만주로 나눴는데 연변은 동만주에 속했다. 동만특위는 중국공산당이 연변에다 세운 당조직이다. 1931년부터 연변에는 중공동만특위의 령도를 받는 화룡유격대, 연길유격대. 왕청유격대. 훈춘유격대, 안도유격대가 륙속 세워졌다.

다섯 개 현의 유격대는 그 인원수가 약 400여 명이였는데 처음에는 무기가 없어 일본군과 반동군벌, 일제의 주구와 지주들의 무기을 빼앗아 내어 자기를 무장했다.  무기를 빼앗아 유격대를 세우는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속에는 로인도 있고 어린이도 있으며 부녀들도 있었다. 걸만촌의 한 여성은 개울물이 불어 강을 건너지 못하는 일본순사 한 명을 업고 강을 건너는 체 하다가  물에 처박고 빨래망치로 머리를 쳤다. 그리고 빼앗은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유격대로 찾아갔다.

연변의 항일유격대는 연변일대에서 일본군과 반동군벌을 상대로 영용히 싸웠다. 그러다가 1934년 3월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편성되는데  연길유격대가 독립사 제1퇀(.)이 되고 화룡유격대가 2퇀, 왕청유격대가 3퇀, 훈춘유격대가 4퇀이 된다. 이때의 독립사는 그 대오가 1,200여 명으로 늘어난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 3월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재편성되면서 대오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항일련군 제2군의 군장은 왕덕태이고 정위가 위증민인데 군 아래에다 3개의 사를 두었다. 그때 동북항일련군은 모두 11개의 군이 있었다. 각 군에는 군장으로부터 아래 련장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이 많았다.

그 원인은 항일유격대의 거의 대부분이 조선족들로 조직되였기 때문이다. 항일련군은 유격대를 기초로 애국적인 구군벌, 산림대 및 기타 반일무장들을 합쳐 세워진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군이었다. 항일련군 제2군은 후에 전투의 수요로  남만에서 활동하는 제 1군과 합병하여 제1로군을 형성한다. 제 1로군은 산하에 3개 방면군을 두었는데 제1방면군은 사령원에 조아범이고 제2방면군은 사령원에 진한장, 제3방면군은 사령원에 김일성이다. 1로군의  총사령원은 양정우이고 정치위원은 위증민이였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동북항일련군은 10만 3,500여 명의 일본군과 위만군을 섬멸하고 1938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8만 2,700여 명의 일만군을 섬멸했다. 동북항일련군이 1935년부터 1940년 사이에 일만군과 벌인 전투는 도합 9만 1,530여 차에 달한다. 항일련군은 1935년 한해 사이에만 3만 900여 차의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동북항일련군이 매일 100여 차의 전투를 벌인 것이나 다름없다.

  동북항일련군은 수적으로 일본군보다 적었으며 무기도 락후했다. 그러나 항일련군은 주로 유인전, 매복전, 습격전으로 일본군을 쓰러눕혔는데 특히 동만의 항일련군 제2군의 전적이 가장 컸다. 제2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늘 주도권을 잡고 승리를 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조선족들인데 전투력이 가장 강했다. 제2군은 3차례나 일본군의 군용렬차, 화물차를 전복시키고 동녕현성공격전투, 휘남현성공격전투, 무송현성공격전투, 대전자공격전투 등 큰 전투들을 벌여 일본군을 경악케 했다.

1939년에 일본군은 11개 사단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1군과 2군)을 토벌했다. 일본군은 산마다 포위하고 길마다 봉쇄하며 마을마다 집단부락을 앉혀 보루를 세웠다. 일본군은 산속에 쌀 한 토리, 신 한 컬레, 소금 한 알이라도 들어가지 못하게 엄격히 통제했으며 누구라도 항일련군에 석 냥 한 가치만 넘겨주어도 련좌법으로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도 살해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지도층을 와해하고 심리전으로  의지를 동요시키는 등 갖은 수단을 다 써가며 항일련군을 사면초가에 들게 했다. 이리하여 1939년부터 항일련군은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보다도 산속에서 굶어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더욱 많았다. 대오를 리탈하는 자가 속출했고 어떤 사람은 반변한 후 총부리를 돌려 항일련군을 쳤다. 항일련군의 우수한 지휘관들이 련이어 쓰러졌다. 3만여 명에 달하던 동북항일련군은 2천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1로군의 삼천여 명의 대오가 1940년에 이르러서는 4백명으로 줄어들었다. 동북의 항일련군은 할 수 없이 소련으로 들어갔다.

   
▲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소련으로 들어간 항일련군은 무기를 보충 받고 군사훈련을 한 다음 다시 소부대로 동북 각지에 들어와 일본군의 거점과 철교, 토찌카, 군용비행장 등 병영과 군사시설을 습격하고 파괴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병력배치와 장비, 군사시설 등을 일일히 정찰하여 소련군에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소련군이 동북으로 진군할 때 일본군의 군용비행기는 한 대도 날지 못했고 대포도 벙어리가 되었으며 병영이 모두 정확하게 선제폭격을 받았다. 이는 항일련군의 공로였다.

  총적으로 동북항일련군은 조선족이 건립한 항일유격대로부터 발전했으며 항일련군에서 조선족장병들이 골간으로 있었다. 초기 항일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 시절에 중국공산당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이었다. 조선족이 많은 대오는 전투력이 강했다. 그러나 희생도 그만큼 많았다. 오늘날 연변에는 산마다 진달래가 피어나듯 마을마다 렬사비가 있는데 이는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잊지 못하는 조선족들의 하얀 마음을 담아 세운 것이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