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글 박현 기자 | 사진 연합뉴스
연간 1조 달러, 세계 9번째 달성
지난해 12월 우리나라의 연간 무역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섰다. 정부는 12월 5일까지의 무역액이 약 1조15억 달러(수출 약 5,155억 달러, 수입 약 4,860억 달러)로 잠정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연간 무역액 1조 달러 달성은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이아에 이어 세계에서 9번째에 해당된다. 이러한 성과는 명실공히 우리 국민들이 해방 후의 혼란기와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매진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G20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그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고 있다.
1960년대, 수출제일주의 속 무역액 증가
6·25전쟁의 상흔이 뚜렷이 남아 있었던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 ‘보릿고개’니 ‘초근목피’니 하는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이 열악하고 부족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무역규모는 영세했고 무역거래체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정책당국의 능력과 의지도 부족했다. 특히 수출에 대한 국민 상당수의 부정적인 시각도 무역규모 확대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 시기 수출에 관한 내용이 보도될 때마다 “물자가 부족한 판에 그나마도 해외에 내다팔면 국내에서는 어떻게 견디느냐”는 반응이 우세했다.
1957년 수출산업의 육성을 통한 수출 촉진책으로 ‘수출진흥요령’이 제정·공포되고 수출5개년계획이 수립됐으나 당시 연간 무역총액은 3억 달러 남짓이었으며 그중 수출액은 약 10%에 해당하는 3,000만여 달러에 불과했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쌀과 어류 및 중석 등 광물이었다.
그러다가 1961년 5·16정변 후 1962년 수출드라이브를 기조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 수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대폭 바뀌게 됐다. 즉 적극적인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 국부를 축적하고 이것으로써 필요한 물품과 석유, 원자재를 넉넉히 사들일 수 있다는 논리가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파고들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급속한 공업화 속에 의류, 인조섬유, 합판, 신발, 가발 등 노동집약적 제품의 수출을 펼쳐나갔다.
이에 더해 월남전 특수로 각종 군수물자의 수출도 늘어나는 호기를 맞았다. 주요 수입품목은 목재, 고무, 석유, 펄프, 양모 등 산업활동에 필요한 원자재가 주종을 이뤘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60년 3억7,600만 달러였던 무역액은 1965년 6억3,900만 달러로, 1967년엔 13억 달러가 넘는 규모로 대폭 증가했다. 특히 1964년에는 연간 무역액 중 수출만 1억 달러를 돌파, 경제 활성화의 기념비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1970년대, 위기 딛고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0년대는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의 생산기반이 마련돼 철강판, 전기기기 등이 주요 수출품으로 새롭게 대두됐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고유가의 위기 속에 갑작스러운 내수 침체와 수출 둔화를 동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 등 아랍권 해외건설 수주 호조에 힘입어 경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아랍권 산유국들은 기반시설이 열악해 사회간접자본(SOC)의 건설에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한 주베일 항만시설은 아랍권 건설 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밖에도 이 지역 각 국은 구식 거주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집단주택을 필요로 해 대규모의 아파트 건설을 발주, 우리 기업들이 상당한 물량을 수주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1977년 비로소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역시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강력한 수출확대정책으로 극복해냈다.
이 시기 섬유류와 가발, 신발 등이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합판, 철강판 등도 수출 비중이 높았다. 1975년엔 123억 달러가 넘는 무역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기계류, 석유, 철, 곡물 등이 주요 수입품목을 차지했다.
1980년대는 국제금리, 국제유가, 달러가치 하락 등의 3저 현상에 힘입어 호황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도 의류, 신발, 섬유직물 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을 통해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경향 속에 자동차, 선박, 음향기기 등 수출 품목이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1988년 무역총액은 1,125억 달러를 초과했으며 이 중 수출 5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품목의 변화 나타나
1990년대는 전자산업과 자동차 부문 등에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면서 수출 품목에 본격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의류·섬유 수출 비중이 다소 낮아진 가운데 반도체, 영상기기, 선박, 컴퓨터, 석유제품, 자동차 등이 주요 수출 품목으로 진입했다. 1995년 무역액은 2,600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이 중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는 정보기술(IT) 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이 경기회복과 경제성장의 기본 토대를 만들었다.
2000년대 역시 고부가가치 IT제품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반도체와 컴퓨터가 수출 효자 품목으로 올라섰다. 선박류와 자동차, 석유제품 수출도 대폭 증가했다. 2004년과 2006년에 각각 수출 2,000억 달러와 3,000억 달러가 달성됐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수출 덕분이었다. 2010년에는 기술집약적인 첨단제품 수출 경향이 더욱 굳어졌다.
반도체가 수위를 이어가는 가운데 선박류, 석유제품,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 자동차부품 등의 품목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에는 선진국들의 경기불황과 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수출 주력품목에 변화가 생겼다. 지난해 11월까지 수출실적을 들여다보면 선박류가 수위에 올랐으며 그 뒤를 반도체, 석유제품과 자동차가 이었다. 결국 연간 무역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서는 역사적 성과에 이르렀다.
무역 2조 달러 위해 수출시장 다변화 필요
우리나라에 앞서 연간 무역액 1조 달러를 달성한 나라 중 이후에도 그와 같은 무역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지난해 기준으로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 6개국뿐이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과 2010년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이루지 못했다.
경제전문가들은 부품·소재 산업육성, 주력산업의 수출시장 다변화와 신성장동력에 대한 투자가 향후 2조 달러 달성을 위한 필수 과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자동차, 가전, 디스플레이 등 주요 수출품목의 필수 부품·소재에 대한 대일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해당 부문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대일무역적자가 지난 2001년 101억 달러에서 2010년 361억 달러로 3배 이상 늘어난 주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 중남미 등 신흥시장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판로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무역액 1조 달성의 성과는 온 국민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정부, 기업을 포함한 각 경제주체들이 무역 2조 달러 달성을 위해 어떤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또 수출 취약품목과 대일무역역조 등의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대안을 찾고 계획을 짜는 활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지속적인 수출 증대와 경제 성장을 위해 가야할 길이 순탄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2년 1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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