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가 지난달 20일부터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마무리되고, 2차 상봉은 24일부터였다. 2박 3일간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환영만찬, 개별상봉, 공동중식, 단체상봉, 작별상봉 순으로 각 2시간씩 총 12시간을 만났다. 이번 상봉은 지난 8월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당시 합의된 사항으로, 2014년 2월 이후 1년 8개월만이다. 1차 상봉은 남측 96가족 389명과 북측 96가족 141명이었고, 2차 상봉은 남측 90가족 255명, 북측 90가족 188명이다. 이들은 6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 겨우 12시간 상봉한 채 또 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상봉장 풍경
1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20일, 상봉장은 울음바다였다. 이산가족 상봉의 첫 일정인 단체상봉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됐다. 65년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들은 혈육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상봉장은 서로 부둥켜안고 손을 놓지 않는 가족들의 눈물로 가득 찼다. 아들이나 딸은 부모님께 큰절을 드리기도 하고, 서로의 건강을 묻고, 빛이 바랜 사진을 꺼내 함께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첫 번째 상봉은 오후 5시 30분에 끝났고, 저녁 7시 30분부터 환영만찬이 있었다. 환영만찬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면서 그 동안의 회한을 털어내는 모습이었다.
1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20일, 상봉장은 울음바다였다. 이산가족 상봉의 첫 일정인 단체상봉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됐다. 65년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들은 혈육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상봉장은 서로 부둥켜안고 손을 놓지 않는 가족들의 눈물로 가득 찼다. 아들이나 딸은 부모님께 큰절을 드리기도 하고, 서로의 건강을 묻고, 빛이 바랜 사진을 꺼내 함께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첫 번째 상봉은 오후 5시 30분에 끝났고, 저녁 7시 30분부터 환영만찬이 있었다. 환영만찬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면서 그 동안의 회한을 털어내는 모습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온 북측 이흥종(88)씨는 남측에서 온 여동생의 부축을 받아 딸 이정숙(68)씨를 만났다. 이씨는 65년 만에 딸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딸 정숙씨가“아빠 나 정숙이야. 나 보고 싶었어요?”라고 아버지에게 묻자 그제서야 이씨는 “소원 풀었다.”고 했다. 이씨 가족은 충남 예산에 살았는데, 한국전쟁 때 이씨는 행방불명됐다. 당시 정숙씨는 두 살이었다.

오인세(83)씨도 이날 남측에서 온 부인 이순규(85)씨와 아들 오장균(65)씨를 만났다. 오씨 부부는 1949년 결혼해 충북 청원 가덕리에 살았다. 이듬해 전쟁이 터졌고 오씨는“열흘만 훈련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생이별을 하게 됐다. 결혼한 지 6개월 20일만의 일이었고, 당시 부인 뱃속에 있던 아들은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돼 이날 아버지와 상봉하게 된 것이다. 아들 오씨는 처음 본 아버지에게 큰절을 하며“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이씨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37년 전부터 남편의 제사를 지내왔다.
채훈식(88)씨는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들 채희양(65)씨를 보자마자 부둥켜안았다. 65년 만에 보는 아들과 5분간 중절모가 떨어진 지도 모르고 껴안았다. 남측에서 온 손자와 부인 이옥연(88)씨도 만날 수 있었다. 채씨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경북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 살고 있었다. 그해 8월 아버지 채씨는 “잠깐(훈련소에) 다녀올게.”라며 집을 나선 후, 징집돼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 채씨는“어머니가 이사를 가면 아버지가 집을 못 찾아온다고 했다.”며“어머니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씨는 허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아버지 채씨는 부인 이씨를 보며“(북한에서) 10년을 혼자 있다가…. 언제 통일이 될지 몰라서 (결혼을 했다)”라고 했다.

이번 상봉에는 처음으로 납북자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 납북 선원 박양수씨와 최영철씨가 동생 박양곤씨와 형 최선득씨를 각각 만났다. 양곤씨는 형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보게 해줘서 고맙다며 말을 잊지 못했고, 최영철씨는 북쪽에 있는 부인의 소식을 전했고, 선득씨는 남쪽의 형과 세 동생의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전시납북자인 북한의 최종석(93)씨와 최흥식(87)씨도 이번 상봉대상에 포함됐지만 모두 사망해 딸 최남순씨와 아들 최병관씨가 북쪽의 이복형제와 만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전해 들었다.
한편, 미처 만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사진을 보며 추억과 회한에 젖은 가족들도 있었다. 남음전(83)씨는 한국전쟁 당시에 헤어졌던 북측의 오빠 남명수(85)씨를 얼싸안고 울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사진을 꺼내 일일이 설명했다. 채훈식씨의 북측 며느리는 북에서 받은 각종 훈장과 표창장을 꺼내들기도 했고, 북측의 리란히씨는 남측 동생들이 고향인 충주의 모습을 보여주자 동생들과 뛰어놀던 고향의 모습을 보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중도에 상봉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이산상봉을 강행한 김섬경(91)씨와 홍신자(84)씨는 이튿날 오전 개별상봉까지만 참석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김씨는 감기 증상으로, 홍씨는 허리 수술을 받은 후라 의료진들은 더 이상 상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김씨의 아들 진천(65)씨는“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며 눈물을 흘렸고, 홍씨의 북쪽 여동생 영옥(82)씨도“통일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해야
이번 상봉에서 우리 측에서는 70대가 9명, 80대가 42명, 90세 이상이 25명으로 80~90대 고령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2010년 이산가족 상봉 때 96명 중 90세 이상은 20명이었다. 북측은 90대가 한 명도 없었다. 이로 인해 부부나 자식 상봉은 23명에서 12명으로 줄었다. 이처럼 고령층에 상봉자가 몰리게 된 것은 죽기 전에 생이별해야 했던 가족의 생사를 포함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고령자를 우선 대상으로 선정했다. 현재 이산가족 정보통신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는 모두 12만 9,000여명으로, 이 중 생존자는 지난해 말 기준 7만 1,000여명인데, 5만 7,000여명은 가족 생사여부도 알지 못한 채 가족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세상을 등졌다.
정부는 북한과 적십자 실무접촉을 늘리면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방침을 추진하려 하지만,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하거나 확대할 경우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지난 19일 강원도 속초 한화리조트에서 실시된 상봉자 대상 방북교육 인사말에서“상봉 정례화를 통해 더 자주 만나고 고향 방문이 이뤄질 수 있도록 북한과 최선을 다해 협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남과 북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한발씩 양보해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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