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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아직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할 3만명의 영웅이 있습니다"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심정순 회장

-호국영령인 아버지의 마지막 뜻과 명예회복을 간절히 원합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못했던 호국영웅기장을 63년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18만여명에게 전달했다. 할아버지들은 훈장을 받고‘박근혜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나라를 위해 싸웠던 지난 흔적을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들은 6·25와 보릿고개를 이겨내는 데 일조하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만들어낸 주인공들이다. 오늘날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후손들의 삶은 어떨까. 선친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가정에서 아버지를 잃은 후손들이 현실 속에서 감내해야할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현행법상 참전유공자의 유족에게는 지원금이 주어지지만 직계후손이 성년이 되면 이마저 중단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뉴스에서 편집위원회 회의를 거쳐 이들의 안타깝고 마음 아픈 사연을 사회에 알리고자 취재에 나섰다.
 
제적01.jpg
 
63년만에 18만여명에게 ‘호국영웅기장’ 전달돼
그러나 역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더 있다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심정순 회장은 지난 2013년 국가보훈처에서 개최한 행사를 잊지 못한다. 그날의 행사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에 호국영웅기장이 첫 수여된 이후 63년만에 이뤄진 ‘6·25참전유공자 호국영웅기장 수여식’으로, 유엔군 참전·정전 60주년을 맞아 6·25전쟁 참전용사 18만여명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참담했던 6·25전쟁에서 적의 진군을 막기 위해 맨몸으로 결연히 싸워 순국한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들’의 명예를 찾아주고 그들을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심 회장은 그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전장터에 나섰기에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인들의 감탄과 부러움을 받으며 선진국 대열에 다가서고 있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로움 역시 이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심 회장에게 그날의 행사가 특별한 것은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남성도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첫 해 6·25참전 유공자 18만여명에게 호국영웅기장 수여했다는 점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환호하며 기뻐했다. 전장터에 나가 싸우면 내 가족을 나라가 지켜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홀연히 나섰을 뿐, 그 어떤 대가를 바라고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전쟁의 영광스러운 상처나 기억을 알아주지 않는 냉혹한 현실이 못내 서운했을 것이다. 거의 자포자기상태에 이르러 기억의 저편에 있는 추억으로 묻혀질 찰나, 그들이 피 흘리며 지켜낸 노고와 공훈을 치하한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젠 노인이 되어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마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박근혜 대통령 만세’를 부르짖은 사람도 있고,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전쟁 후 지금까지 이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 조국을 향해 얼마나 깊은 한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적2.jpg▲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심정순 회장은 아버지의 옛 전우들이 호국영웅기장을 받는 것을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대한민국 만세, 박근혜 대통령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하지 못한 호국영웅기장을 참전용사 18여만명에게 전달한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7월 2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ㆍ정전 60주년 기념식 당시 호국영웅기장을 받은 참전유공자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며 축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수여권자인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과 미국을 대표해 감사패를 받은 성김 주한 미국대사가 함께했다.
 

이날의 광경을 심 회장을 포함한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회원 3만명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전몰군경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선친은 이미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6·25전쟁 참전용사에게‘호국영웅기장’을 수여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준 마음에 감사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킨 공로로 이날 공훈을 받은 참전용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기억조차 희미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자신들의 아버지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셨으니‘호국영웅기장’훈장을 받는 사람들 중에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애국심,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3만명이 뭉쳤다.
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심정순 회장은 선친이 6·25전쟁 참전용사로 전쟁에 나갔다가 순국하신 뒤 모친마저 6개월 후에 세상을 달리하는 바람에 전쟁고아로 자라나 모진 세상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인물이다. 현재 심 회장이 있는 단체의 회원은 3만명으로, 이 중 심 회장과 같은 제적유자녀는 5400명이다. 여기에 비록 어머니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당시 전쟁 상황으로 인해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 재가하는 경우가 흔해 고아 아닌 고아로 버려진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고아가 된 경우 조부모집이나 친척집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입 하나 덜기 어려운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눈칫밥을 먹기 일쑤였고, 눈물로 배고픔을 대신 하는 노예생활과 같은 노동을 하다 결국 도망쳐 나와 식모살이나 또는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연명할 정도였다.

그 사이 어느새 심 회장은 성년제적자가 돼 있었다. 6·25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의 자녀들에게 성년이 될 때까지 국가에서 보상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유족에서 제적한 것이다. 제적 당시까지 받았던 총 금액이 약 14만원이 안 됐다고 하니 조국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에 대한 예우치고는 참 보잘 것 없는 처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에는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그럴 만한 여력조차 없었다. 오로지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고,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할 수 밖에 없었다. 간혹 비참한 삶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이도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친을 생각해서라도 심 회장은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고, 심회장과 3만여명 회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집에서 선친이 묻혀 있는 현충원까지 지척거리이지만 심 회장은 그마저도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자주 들르지 못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전쟁고아들이 이와 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하던 중 가까운 지인을 통해 지금의 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소식을 듣게 되고, 곧바로 단체를 찾아가 잃어버린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로 마음먹게 된다. 심 회장이 그 누구보다도 제적유자녀회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우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 회장은 대부분의 회원들이 자신처럼 자신이 되찾아야 하는 권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1992년부터 2008년까지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등 제적유자녀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30년 동안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중단되었던 수당이 다시 지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지난 95년 한 분의 분신으로 인해 이들의 딱한 사정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1년부터 생활조정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지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한 사람의 희생과 회원 모두의 힘으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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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아닌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원합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공공요금 혜택과 의료복지서비스 절실

얼마전 일본과의 위안부 할머니 합의문제가 제적유자녀회 회원들에게 유독 관심을 끄는 것은 자신들도 전쟁으로 인해 선친을 잃고 전쟁고아로 자라나 일흔을 바라보는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살아 생전에 선친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하늘나라에 가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 못한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심 회장은 우선 아버지의 이름으로 연금이나 보상급여가 아닌 수당으로 나오고 있는 제도부터 고쳐야 한다고 정부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산화한 고인들에 대한 예우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수당 명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인들이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연금이나 보상급여로 변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들에게 지급되는 있는 금액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114만 1천원이다. 단순히 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재의 보훈보상체계는 국가유공자의 공헌도에서 전사자가 1순위로 돼 있지만, 이들은 그러한 예우나 권리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국민의 생명과 조국의 안전을 위해 죽음으로 지켜낸 공훈이 부상으로 인해 전역한 전상군경보다 못하고, 보상 또한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 회장은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줄은 알지만, “국가유공자 유족에게 이처럼 소외된 보훈정책을 실시한다면 또 다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 놓이게 됐을 때  누가 목숨을 바쳐 조국을 구하려 하겠느냐”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사랑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전쟁 등 국가 위기상황에서 누가 앞장서서 나서겠냐”고 말했다. 심 회장은 그 출발점이 바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제적유자녀회 회원들은 성장과정에서 80% 이상이 무학자로, 안정적인 생활기반마저 갖지 못한 회원들이 많다. 아무리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다 해도 생활의 기반을 모두 빼앗긴 채 벌거벗겨진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인생의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이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많기 때문에 공공요금이나 의료, 복지혜택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훈처에 등록된 전상군경보다도 국가 공헌도가 높은 데도 불구하고 현재 이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이들 회원들은 고령으로 인해 취업도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복지혜택이 더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심 회장은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인데도 국가유공자의 후손들이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며 “국민 모두가 복지혜택을 골고루 나눌 수 있도록 국가와 관계부처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사회적 관심을 부탁했다.

 “우리는 나라를 구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남겨진 가족들은 정부가 책임져줄 거라는 믿음에
나라 지키는 데 두려움은 없습니다.”

제적유자녀회 회원들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버지의 신념과 달리, 국가에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공공요금 및 의료복지서비스 등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막막하기만 한 세상을 홀로 살아왔다. 성년제적자라는 말뜻도 모른 채 국가에서 지급을 중단하자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가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남기신 뜻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길고 긴 싸움을 거쳐 돌아가신 아버지 명의의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것은 돈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이자 신념이며 곧 나라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과도 같은 애국심이었다. 비록 최저임금에도 못미치고 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나오는 돈이라고는 하지만, 회원들에게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이름이 이 대한민국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고 한다.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심정순 회장은 지금부터는 회원들과 힘을 합쳐 이 나라가 기억해줘야 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직도 하늘나라에서 일흔이 넘은 자식 걱정을 하고 계실 아버지의 염원을 살아 생전에 풀어드리고, 그제야 마음 놓고 아버지께 제사상을 올리면서 이제 편안하게 쉬시라 말씀드리고 싶다는 심 회장은 이 작은 소망마저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애국자들이  홀대받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모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나라로부터 보호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일흔의 노구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 마디를 부탁하자 심 회장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병과 맞서 싸울 때 힘없는 부녀자들이 조국을 위해 미력이나마 치마에 돌을 날랐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나라를 구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또 다시 나라가 위험해지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쟁에 나선 아버지처럼 우리도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라고 밝혔다.
 
제적4.jpg▲ 심정순 회장과 함께 3만여명의 대한민국6·25전몰군경 제적유자녀회 회원들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우들의 명예회복운동을 벌이고 있는 (왼쪽부터)한태환 전 사무국장과 김진호 사무총장, 최서윤 회원
 
기사뒷말 
심정순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사에 바쁘시겠지만 제적유자녀회에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준다면 3만명 회원이 그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 기회를 통해 회원들과 함께 너무 가슴이 답답해 보훈처를 찾아가면 최선을 다하는 줄 알고 일에도 한계가 있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보훈처밖에 없었다며 그동안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보훈처장과 관계자 여러분들에 사과와 감사의 말을 아울러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미니 인터뷰 - 제적유자녀회 한태환 전 사무국장
“잘 아시다시피 저희 제적유자녀회 단체는 일체의 지원금도 없이 회원들로부터 십시일반 회비를 걷어 운영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직책을 맡아봤자 무슨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들 먹고살기 바빠 회장을 맡으려고 하지 않죠. 그런데 심정순 회장님은 달랐습니다. 회원들과 단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분이야말로 꼭 놓쳐서는 안 되는 분이라고 생각했죠.”
 
심정순 회장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자 나온 한태환 전 사무국장의 말이었다. 본인도 사무국장을 하면서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알기 때문에 심 회장의 고충을 잘 알지만, 사심 없이 3만명이나 되는 회원들과 호국영령이 되신 이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 회장을 무한 신뢰하게 됐다고 한다. 심 회장이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에도 삼고초려가 아닌 십고초려라도 해서 꼭 모시고 있어야 하는 분이라고 했다.
 
심 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들은 한 전 사무국장은 회원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회원들의 경제적인 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국가에서 임대주택이나 아파트를 제공해도 임대보증금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월 임대료가 없어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회원들을 위해 2011년 잠깐 회원 중 일부에 대해 실시된 실태조사를 지속적으로 해주도록 정부에 촉구하고 있고, 주거지가 없거나 불안한 회원들이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공동주택 공간을 설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전 사무국장은 “굳이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 않을 일을 찾아서 하는 분이다 보니 심정순 회장님이 저희 단체에 꼭 있어야죠.” 한 전 사무국장은 최서윤 회원과 함께 심정순 회장을 돕고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한다.
 
미니 인터뷰 - 제적유자녀회의 산 증인, 김진호 사무총장
제적유자녀회를 평생 함께하며 늘 맨 앞에서 앞장서온 산 증인인 김진호 사무총장은 제적유자녀회의 시작부터 험난한 싸움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92년 당시 제적유자녀였던 故조인성 씨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제적유자녀에 대한 권리와 대우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제적유자녀를 모아 92년 8월 13일 여의도에서 4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궐기대회를 하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러본 적 없는 제적유자녀들이 상여를 만들어 장례식을 치루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딛게 된다.

김 사무총장도 이때부터 제적유자녀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현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대한민국 속에 알리기 시작한다.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겪어야 했던 벽은 훨씬 높았다. 김 사무총장은 공법단체 행사가 있었던 95년 국가보훈처 면담을 하러 가기 위해 가던 중 경찰이 이들의 앞을 가로막자 경찰차 위에 올라가 세상을 향해 울부짖던 회원 4명의 얼굴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그들 중 2명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떠났고, 남은 2명 중 한 명이 최서윤 회원인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에 대한 대우가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김 사무총장은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할아버지의 나라사랑을 들려주며 오늘의 행복이 그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원보훈원 내에 있는 호수에서의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오늘날의 혜택을 받게끔 발판을 마련해 준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제적유자녀회 회원들을 독려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다고 한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다. 비록 앞으로 제적유자녀회가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하다 해도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면 하늘도 감복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의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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