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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국방

“간절한 기다림 끝에, 68년 만에 아들 품으로”

2009년 강원 인제서 발굴된 고(故) 김영인 육군 결사유격대원,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10월 31일(목) 14시, 경기도 부천시 보훈회관에서 고(故) 김영인 육군 결사유격대원「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실시힌다.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는 6·25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쳤으나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신 전사자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행사이다. 


이번 행사는 유가족 20명을 포함하여 국가보훈처장,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 부천시장, 시의회의장, 17사단 부사단장,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등 8개 보훈단체가 참석할 예정이다.



정부에서는 전사자 예우와 행사의 품격을 격상시키고자 이번 행사부터 국가보훈처장이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행사의 시작은 허욱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유가족들에게 고 김영인 결사유격대원의 참전과정과 유해발굴 경과에 대해 설명하고, 신원확인통지서와 국가보훈처장 위로패, 유품 등이 담긴 「호국의 얼 함」을 전달한다.


고인의 아들 김해수(75세)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준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들께 너무 감사드리고, 소식을 기다리고 계시는 다른 유가족들께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고 김영인 결사유격대원의 유해는 유가족들과 협의를 거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고 김영인 대원은 1951년 1월 말, 육군 결사유격대 제11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같은 해 2~3월경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1월 4일 육군본부는 예비병력 가운데 일부를 차출하여 직할대인 ‘결사유격대’를 창설하였다. 부대는 제 11연대, 제 12연대, 제 13연대, 제 15연대, 제 16연대 및 특별대로 편성되었으며, 1951년 1월 말부터 4월 초까지 60여 일간 강원도 영월․평창․인제 등지에서 활동했다. 


고 김영인 대원은 11연대 소속으로 설악산 일대 침투기동 간(1951년 2~3월) 매복한 인민군에 의한 총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 김영인 대원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완전유해로 발굴되었으며, 무궁화 무늬 단추, 전투화 등을 포함한 14점의 유품이 함께 발견되었다.



고인의 신원확인은 유전자 검사 기법 중 핵 검사(STR : Short Tandem Repeat) 기술이 16개 좌위 에서 23개 좌위로 분석 가능하게 발전 한 것을 적용해 가능했다. 국유단은 2013년 이전에 16개 좌위의 핵검사를 실시한 유해 중 신원확인 확률이 높은 유해 174건을 대상으로, 1차 50건에 대해 23개 좌위 핵 검사 시료를 채취해 국방부 조사본부에 재검사를 의뢰하였다. 


이 중 고 김영인 대원의 아들 김해수 씨가 등록했던 DNA를 통해 최종 신원을 확인하였다.  신원확인 확률이 높은 유해 174건 중 ‘고 김영인 대원’의 신원확인은 첫 사례이며, 지난 10월 20일 고 김홍조 하사의 신원을 추가로 확인하는 등 앞으로도 신원확인이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고인과 고인 아내의 애달픈 삶이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고인은 1923년 1월 29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 후, 18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4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난시킨 후 28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다.


전투에 참가하기 직전, 피난길에 있던 아내가 막내를 출산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인은 자전거를 타고 한 숨에 달려와 아내를 보살핀 후 가족들에게 건빵을 가득 챙겨주고 홀연히 떠났다. 안타깝게도 그 뒷모습이 가족들에게 고인의 생전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고인의 아내 오숙영 여사(2012년 作故, 서울 현충원 충혼당 안장)는 고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동네에서 가장 해박하여 당시 동네주민 앞으로 오는 6·25전사자 통지서를 대신 읽어주며 슬픔과 애한을 함께 하였다.


특히, “공직자는 땅이 있으면 안된다”는 집안 어르신의 가르침에 땅 한마지기가 없는 상황에서 험한 일을 하면서 4형제를 홀로 키웠다.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방침이 있었기에 4형제 중 3형제가 장성하여 장남은 7사단, 차남은 해병대, 삼남은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용사, 호국가문이 될 수 있었다.


고인의 아들 김해수씨는 “어릴 때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가 계셔서 직접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나는 부를 아버지도 안 계시는 것이 한이 맺혔다. 학교 다녀오면 혹시 집에 아버지가 계실까 기다렸던 것이 68년이 지났다. 이제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을 풀게 되어서 감격스럽다. 아버지가 국가를 위해 싸우시다가 전사한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이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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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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