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은 1919년 영국의 에글렌타인 젭(1876~1928) 여사가 창립했다. 1차세계대전 후 패전국으로 더 어려움에 처한 적국의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로 설립되어 현재는 회원 28개 국가에 120여개 지부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1953년 전쟁 직후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가입은 1981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했다. 국내 26만 여명의 회원이 매달 후원하는 십시일반 금액이 2017년에는 556억원으로 사업비의 80% 정도를 충당한다. 국제민간단체들로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불과 몇십년 만에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전 세계에서 유일한 대한민국. 오준 전 유엔대사는 올 7월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오준 이사장 인터뷰 첫마디는 전임 김노보 이사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였다. 김 전 이사장이 NGO단체에 걸맞게 직위에 상관없이 동등한 사무실 공간 지급, 출장 시 동급의 처우 등 청렴하고 투명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본연의 목적에 맞는 일에 치중함으로써 한국 세이브더칠드런의 기틀을 아주 잘 잡았다고 한다. 그 기반 위에 오준 이사장이 내년 100주년을 맞는 조직의 도약 준비를 하고 있다. 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이집트에서 열
11월 14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독일 한스자이델 재단이 ‘사회적 시장경제 담론: 세계화는 실패했는가?’라는 주제로 연 학회에 백영훈 원장을 기조연설자로 초대했다.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독일 학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이다. 유창한 독일어로 한국이 국민소득 70불에서 3만불에 이르기까지 경제성장 과정에서 독일과 한국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기조연설이었다. 이날 학회에는 독일에서 온 학자들과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다수의 외국 학생들이 참여했다. 백영훈 원장은 멀리 독일에서 강연을 듣기 원하는 학자들이 온 것을 알기에 감기로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깔끔한 모습으로 강단에 섰다. 독일어 강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국내에서 백 원장의 열정적인 강연을 많이 들어본 경험으로 표정을 보면 어느 대목을 말하는 지 짐작이 간다.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과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빌리는 과정, 박 대통령 독일 방문 시 일화, 그 차관으로 이룩한 한국의 경제발전상 등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노학자의 기억에는 생생해 대목마다 감동이 그대로 표정과 억양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을 10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딘 헤스 대령은 미국의 공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국 공군의 F-51D 머스탱 18번기 신념의 조인기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공군을 지원 할 제6146군사고문단을 창설하면서 그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 시작이었다. 제6146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작전을 한판 승부(Bout One)라 이름 짓고 부대명도 이 이름을 따서 바우트 원 대대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전시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미군은 바우트 원 대대를 해체시켜서 미 공군에 전속시킬 것을 결정하지만 상부에 부대의 존속을 결사적으로 주장했고,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존속할 수 있었다. 헤스는 전투기가 부족하다는 상부의 압박이 들어올 때마다 교육 중인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하였다. 훈련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헤스는 1951년 6월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각종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미 공군 조종사들이 100회의 출격을 달성하면 일본 등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현천묵 (玄天黙, 1862.4.9.∼1928) 선생을 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40대 중반이었던 1906년 보성학교 학감으로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며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09년 보성학교의 교장과 경성향교 직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했고, 이후 지회장을 맡아 경성지회의 활동을 공고히 시키고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대한협회 경성지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1909년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단군교(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11년 사이 북간도로 망명했다. 우리겨레, 우리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대종교 이념은 선생에게 다시금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북간도 망명 이후 선생은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여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고,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용덕 (崔用德, 1898. 9. 19.~1969. 8. 15.) 선생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익혔고, 1916년 원세개가 설립한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다. 이러한 경험은 선생의 항일무장투쟁에 큰 자산이 된다. 1919년 중국에서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거주하던 중국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 모집을 위해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생은 단장 김원봉과 함께 1922년 의열단의 국내거사를 준비하여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이후 북경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1926월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기여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선생은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했으며,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약 천 년 전 고려 시대에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기록된 내용에는 고려 문종 때 요나라에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외국 순방길에 한국의 전통공예나전칠기를 기념선물로 준비했다. 이를 계기로 나전칠기의 우수성과 전통공예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왜 중요한지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디자인조선 이두은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문재인정부에 나전칠기 작품을 납품했다고 들었습니다”고 질문하자 “우리의 전통공예, 특히 나전칠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게 되어 기뻤습니다”며 새로 개발한 작품 ‘곤룡포’ 필통&명함꽂이를 선보였다. 한국의 전통미 현대적으로 새롭게 디자인 Q 디자인조선 명칭이 독특합니다.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A 한국의 전통적인 나전칠기공예의 기법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전통문화와 이미지는 시대에 맞게 현대적으로 디자인하였고, 옛것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디자인조선이 추구하는 기업 정신입니다. 작품적 측면에서는 금속 표면 위에 엄선된 양질의 자개를 디자인에 따라 손으로 일일이 깎은 뒤 수놓아 공예예술품으로서 기품을
강산민요 망곔소리 충남보존회(회장 권정현) 현판봉안식이 지난 7월 27일 충남 당진시 원당동에서 있었다. 망곔소리는 조국의 강토(疆土)를 악보로 하고, 민족의 역사를 노래로 하여 우리 창(唱)으로 읊어내는 민요이다. 특히 망곔소리는 선소리타령과 달리 ‘천강(天降) 세행(世行) 전승(傳承) 승천(昇天)’ 즉 ‘와서 살다가 주고 간다’는 인생과정이 담긴 4대 성음으로 발걸음의 보박(步拍)에 맞춰 폭넓은 음률로 풀어낸다. 강산민요 망곔소리는 인문학 세계지도자 총령 하정효 선생이 발굴해 보존에 나서고 있다. 강산민요 망곔소리 충남보존회는 전국 최초로 제대로 조직을 갖추고 망곔소리 전승과 진흥에 나섰다. 이날 현판봉안식에는 지역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강산민요 망곔소리 충남보존회의 발전을 기원했다. 김홍장 당진시장, 홍기후 충남도의원, 정산영 당진시부의장, 양기림‧윤영수 시의원 등과 지인 및 회원들이 강산민요 망곔소리 충남보존회의 ‘흥 출발’을 축하했다. 김홍장 당진시장은 축사를 통해 “우리 전통 민요는 오랜 세월에 걸쳐 민족의 혼과 정서를 노래에 담아 전승”했다면서 “이제 강산민요를 가깝게 접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당진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강
1992년 6월 리우환경정상회의 이후 에너지와 환경에 대한 공존경제개발방식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에너지 대량소비는 이산화탄소(CO2)를 배출하여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도 몇 손가락에 꼽는 이산화탄소 배출국이 되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건설 전문가들은 창에 해답이 있다고 말한다. 건물의 얼굴 창문은 에너지절약의 주역 본지는 창이 집과 건물의 부속품이 아니라 에너지와 환경론적 측면에서 창의 기능을 탐구하는 기획을 마련, 여러 전문가의 추천으로 6000 곳 창호기업 가운데 최고의 리더로 꼽히는 (주)글로윈스를 선정했다. 이유는 창호업계 주역으로서 기술혁신을 통해 친환경 창호를 생산하며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수 기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인턴 채용으로 청년실업 문제 해결에도 일조하고 있다. 박영배 회장과 김미숙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응할지 말지를 고민하기에 기자가 이렇게 설득했다. “글로윈스 가족들이 폭염 속에 전국을 누비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로윈스의 정신을 독자에게 알리면 발로 뛰는 직원들에게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에 흔쾌히 수락했다. (주)글로윈스는 서울에 본사와 경기도 남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허봉익 육군 대위를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허봉익 육군 대위는 안동전투에서 백병전 중 전사했다. 안동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에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 1연대가 안동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 소속 일부 병력의 침공을 4일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7월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은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이 무렵 육군본부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7월 31일 24시를 기해 안동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제8사단은 낙동강전선으로 철수작전 진행 중 제16연대는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았다. 이로 인해 연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각개로 철수하였고, 포위망 돌파와 도하과정에서 연대병력 중 장교 21명과 병사 81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제3대대 3중대장 허봉익 대위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발휘하여 2개 소대 병력을 인솔하여 안동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2개 대대 병력과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가 지휘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교헌(金敎獻, 1867. 7. 5.~1923. 11. 18.) 선생을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67년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부친 김창희와 모친 풍양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인 188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몸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부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민족의식을 자각한 선생은 일본인들의 횡포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되었다. 한편,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 와 신단민사(神壇民史) 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서 망국이후 한국 국민들의 애국혼을 고취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